바울의 선교원리
제 출 자 : 유성두 강도사
1. 서 론
1. 동기와 목적
선교신학자와 선교사로서의 바울은 어떤 원리와 전략을 가지고 일하였을까? 우리는 누구나 이런 질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선교 여행을 나설 때, 미리 그의 여정을 계획하거나, 교회를 설립할 전략적인 지점들을 선정하고 나서, 그런 그의 계획들을 실천에 옮겼다고 볼 수는 없다. 여기에서 원리라는 개념을 '인간의 관찰과 경험을 기초로한 의도적이며 공식화된 인위적인 활동 계획'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바울은 전혀 선교 원리나 전략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지시와 통제를 철저히 따르는 융통성있는 활동 방식을 원리와 전략이라고 할 때에는 그가 훌륭한 선교 전략들을 개발 활용한 전략가였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의 선교전략을 알기 전에 먼저 그의 선교원리를 알아봐야 한다. 원리가 기둥이 되어 전략의 가지들을 더 튼실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바울의 선교원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범위 안에서 찾으려 한다. 그리고 바울의 선교원리를 앎으로 인해 현대 선교원리의 기초를 알 수 있고 배울점들을 알아보려 한다.
2. 본 론
1. 바울의 선교원리
1)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복종한다는 점을 최고의 선교 원리와 전략으로 삼았다.
성령께서 열어놓으신 문들을 통해 나아갔을 때, 복음을 널리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게도니아 선교를 시작한 이야기(행 16: 6-10)에서 이런 면은 더욱 생생하다.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 생활이 필수적이었으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도 생활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과 말씀을 통해 새로운 선교 활동의 장을 찾아가고 준비했었다(행 16:6-9, 18:9, 22:18, 23:11). 이런 것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인 줄 믿고 순종했던 것이다.
2) 바울은 복음의 진리는 고수하되 부차적이고 문화적인 것은 양보한다.
이런 점이 오늘날 선교 현장에서 회심자들이 복음의 내용뿐만 아니라, 부차적인 것들까지도 발전된 문화와 교육을 배우고 따라주기를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복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관습이나 문화까지 전해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에 관한 한 진리의 사수에 목숨을 걸었지만,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 . . . .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 8-9).
라고 함으로써 복음에는 타협이나 양보가 있을 수 없음을 밝히 보여주고 있다. 그 대신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 이외의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는 철저히 적응이라는 원리를 따랐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로 인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 19-23).
이런 원리는 때로는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할례 문제에 초월해 있었지만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행하려 했고(행 16: 3), 디도에게는 거부한 것(갈 2: 3-4)이 예이다. 우상의 제물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는 상황화에 있어 민감하게 반응하고 민첩하게 행동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 13)고 선언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 총회에서는 타문화권에서의 선교 중에 기독교의 구원 교리인 그리스도의 기독론은 절대 훼손시키지 않은 채, 가장 큰 장애물인 할례 문제를 해결지어 버린 것을 볼 때 바울이 얼마나 융통성 있는 선교사인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양보의 원리 다시말하면, 순응의 원리는 오늘날 복음의 상황화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3) 바울은 제한된 지역에서의 집중적 선교 활동을 폈다.
바울의 이 원리는 선교에 있어 효율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울의 선교적 소명감은 '멀리 이방인에게'(행 22: 21)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알려진 모든 지역을 찾아가 복음을 전할 수는 없기에, 당시의 번영하는 4개 지역 곧 아시아에 속한 갈라디아와 소아시아, 유럽에 속한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에서 전도 활동을 집중하였다. 이런 집중적인 방식을 통하여 그는 수년 만에 교회가 없었던 이 지역에, 많은 교회들을 든든하게 세우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은 세계의 모든 이방인을 한꺼번에 복음으로 인도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아직 복음화되지 않은 몇몇 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도 그 지역의 중심이 되는 도시들에 교회를 설립했던 것이다. 회중을 많이 모으는데 힘을 쏟기보다는 교회를 세우고 자립적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면서 일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스스로 설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 일들을 다른 동역자들에게 맡기고, 다음 사역지 곧 아직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다.
이렇게 도시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는 그 주변 지역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세워진 교회는 언제나 새로운 선교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대도시 중심의 선교는 여러가지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그것은 로마의 행정 중심지로서 적어도 바울처럼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신변 보호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희랍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로서 통역을 필요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런 곳들은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로서 흩어진 유대인들이 회당을 가지고 있는 곳들이었으므로,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하고 그들이 거부하면 이방인에게로 향했던 바울의 전도 우선순위와도 부합되는 것이다. 실제로 회당 자체가 일종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으니 곧 혈통으로는 이방인이었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God-fearers)이 있었다. 이름모를 그들은 복음의 선봉장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4) 인격적인 삶의 모범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 18,19).
라고 함으로써 말과 더불어 행함이 복음전파의 수단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너희는 . . . . . . .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 되었으니"(1: 6)라고 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바울에게 이끌리어 나왔고, 그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요 종으로서 본래 가지고 있던 고귀한 것들(바리새인, 학식, 로마 시민권 등)을 오히려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여기면서 지도자이되 섬기는 지도자(servant-leadership)로서의 삶의 본을 보인 것이 선교의 한 수단이 된 것이다.
5) 선교지에서 동역자를 발굴하여 그 사람들과 더불어 선교 하였다.
그는 혼자 선교사역을 담당하려 하지 않았다. 늘 어디를 가든 그 지역에서 동역자를 찾았고 가르치며 함께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또한 문벌, 직위, 성별, 출신 등을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동역자들은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 되었다. 레위인 바나바, 한쪽으로만 유대인의 피를 받은 디모데, 헬라인 디도, 유대인이 아닌 의사 누가, 회당장이었던 소스데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아볼로, 마가와 실라 등 그의 동역자를 모두 열거하기는 어려우며, 그 출신도 각 계 각 층에 퍼져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외로운 전도자가 아니라 많은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을 지휘한 선교 사령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6) 바울의 선교 원리는 삼자원리(three self principle)였다.
그가 세운 교회들은 자치, 자립, 그리고 자전하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세운 교회들은 스스로 지역 복음화의 사명을 위해 일하였으며, 외부의 통제나 지도를 받지 않고 오직 성령에만 의존하면서 세워진 교회였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복음사역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생 교회들은 재정적으로도 외부의 어떤 힘에 결코 의존하지 않았다. 즉 바울 자신도 선교를 위한 재정적인 정책은 자비량 선교였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살리라(고전 9:14).
사도로서 재정적인 뒷받침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었음에도 주님이 몸소 보여주신 원리대로 그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일함으로써 자신과 동료들의 필요를 감당하였고, 세워진 신생 교회들도 재정적으로 자립하도록 했다. 동시에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들을 위하며, 그들의 궁핍을 외면하지 않고 또한 도우도록 했다. 하지만 바울은 교회가 보내주는 선물을 거절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받아 사용하였다(빌 4: 15-16). 이러한 원리는 오늘 날의 선교에서도 보기 힘든 원리였다고 할 수 있다.
7) 소명에 대한 확신
바울는 분명한 부르심을 받았고 자신의 길을 달려갔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1:15).
바울은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1:1).
에서도 바울은 자기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자기 소명에 확신을 가지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확신이 바울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고 수없이 많은 고난과 고초에도 찬송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물론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맡은 사명을 감당하려는 바울의 의지도 곁들어서 말이다.
분명한 것은 바울의 선교원리 중 확실한 소명의식과 확신이야 말로, 바울이 선교를 감당하고 순종으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원리였음에는 의심할여지가 없다.
3 . 결 론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행동도 민첩하게 했다. 즉 바울의 선교원리의 기초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선교현장에서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리이다.
인터넷의 많은 자료들과 다양한 매체를 통한 수많은 지식과 정보는, 선교원리를 결정하고 따르는데 있어 오류에 빠지도록 이끌기가 쉽다. 분명하고 온전하며 정확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반응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 충만함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었고 바울 자신을 본받으라고 할 정도로 확신이 있었다.
바울이 보여준 성령 충만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순종하는 민첩성은 선교현장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확실한 자기 소명의식이 없이 선교에 뛰어드는 것은 불순종이고 무익한 행동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자기 소명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선교지에서의 선교사들은 지금도 이것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 확실하다고 생각해서 왔지만 고난이 연속으로 감당 못하게 찾아오면, 이 소명의식은 점덤 얇아지는 지고 나중에는 흔적조차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선교훈련과 지속적인 자기 소명의 확신이 없다면 한 번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가진 확고한 소명의식은 고난에도 찬송하고, 억누르는 압박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하나의 근거였고 원리였다.
현대에 와서 이 상황화는 많은 의견과 사건 속에서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영적인 문제와 구분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적이고 마귀적이며 반기독교적인 것과의 구분은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상황과 문화와 역사, 그리고 환경이 확실한 경계선을 긋게 하지 않는다. 두루뭉실하도록 이끌고 조금씩 야금야금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리의 말씀을 손대는 것에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에 조금도 반하여 선택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았다. 타협과 상황화는 다르며, 절충과 상황화도 다르다. 오직 말씀의 진리에서 요동치지 않고 한 눈 팔지 않으며, 쉬운 길이라 해도 가지 않는 절제와 순종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현대 선교 현장은 전쟁터이다. 상황화의 인식과 범주를 잘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반성과 뒤돌아 봄이 필요한 시점에 왔다. 그러므로 바울의 상황화 원리는 시사하는 것이 많다.
바울이 선교원리는 하나님 중심이며 교회 중심이며 말씀의 진리 중심이다. 즉 철저한 확신과 성령충만의 절제, 여기에 깊은 숙고와 민감한 상황화, 그리고 팀 사역과 효율성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참 고 도 서
허버트 케인,「선교 신학의 성서적 기초」, 이재범 역(서울:도서출판 나단, 1988).
조귀삼,「바울과 선교신학」(서울:은성, 1995).
박영호, 「선교학」(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서정운, “선교신학자, 바울”「목회와 신학」(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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