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선교의 성장과 돌봄
담당교수 : 김 학 유 교 수 님
제 출 자 : 유 성 두 강 도 사
들 어 가 기
바울이 선교에 있어서 성장과 돌봄을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근거와 자료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현대 선교 역시 바울이 선교할 때와 마찬가지로 성장과 돌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바울이 따른 선교 원리와 전략, 방법에 어떤 것들이 있고 또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
주로 바울이 교회와 성도 개인의 성장을 위해 어떤 방법들을 사용했는지와 돌보기위해 또한 어떤 조치들을 했는지 그 내용과 방법들을 알아보기로 한다.
1) 권 위
먼저 바울은 장로를 세워 교회들이 점점 불어나고 커지는 것에 발 맞출수 있도록 한다. 한 교회에 두 명 이상의 장로들을 세워, 그들이 설교와 행정 등을 나누어서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므로 각 교회는 바울을 의지하지 않게 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울의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에 전도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회는 바울에게서 독립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문제가 생길 때마다 권위를 내세우면서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후10:8)”
그리고 예배와 그 외 여러 문제들에 대해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고전11:34)고 말함으로써 직접적인 참견도 내비쳤다.
또한 바울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저항에는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후13:2)”고 엄포를 놓는다.
(1) 간음 문제
: 교회는 사람이 많아졌다. 하지만 차츰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방인들의 세계에서 만연되고 있던 성적 부도덕성은 교회 내를 어지럽혔던 문제였다. 고린도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 등은 간음의 문제가 심각했다. 특히 고린도교회가 그랬는데, 고린도교회는 2년 반 이상을 바울이 있으면서 교육했고 아볼로의 가르침으로 영적으로 풍요했었다. 하지만 간음은 공통된 문제였고 범죄였다.
바울은 이 간음 문제에 있어서 고린도교회가 스스로 신앙 안에서 잘 헤쳐나가길 원했다. 그래서 편지 속 내용에는 율법이라는 단어가 없다. 그리고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그 과제에 관해 지침을 내놓았다는 아무런 시사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바울은 규범과 벌칙으로 범죄자들을 위협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오직 그들 스스로가 바로 잡아 주기를 바랬다. 즉 주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고 육체와 영혼을 성스럽게 할 것이며, 부정은 반드시 성령의 거부하심과 하나님의 진로를 초래할 것이라고 훈계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살전4:3-8)”
그리고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을 보면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든 사귀지 말라(고전5:11)”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파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간음하는 자만 지칭하는 것이 아닌, 탐욕이 많은 사람들, 남을 헐뜯는 자들, 착취자들, 술 취한 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귀지 말라는 의미는 형제의 과오를 시정시키기 위한 개인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라는 훈계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데살로니가후서의 훈계와 비교된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3:6)”
고린도교회에는 절교하라고 지시하고 데살로니가교회에는 추방시키라고 훈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바울이 각 교회에 보여준 모습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른 것이다. 예수님의 방법은 원리를 반복하여 계속 가르치고 제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실천하도록 내맡기는 데 있음이 자주 지적되어 왔다. 제자들의 파송(눅9:1-6; 10:1-20)과 그 외 많은 사건들 속에서 예수님은 반복학습과 제자들의 부족함을 아시면서도 실천하고 경험하면서 깨닫기를 원하셨다. 즉 사도 바울은 교회에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올바른 과정과 행동을 지적해주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며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리라는 굳은 신념을 그는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표현하였다.
(2) 송사 문제
: 이름은 모르지만 어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교도 법정에 같은 교회 성도들을 기소했던 것 같다. 이것은 분명한 위법행위이며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행위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모습에 교회의 법규를 가지고 금지하거나 벌을 주는 등의 위협적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의 부도덕성을 공표하기보다는 위해를 당하는 편이 더 낫고, 성도들을 해치고 속이는 것은 자신들을 이교도와 같이 만드는 일임을 그는 그들에게 역설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6:7)”
그런 다음 그는 전체 성도들에게 이치를 따져 설명하고 그의 논지를 밝히는 것에 우선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스스로에게 맡겼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6:11)”
(3) 우상의 제물의 먹는 일
: 예루살렘 종교회의는 이방인 성도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말도록 선언했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15:29)”
고린도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뿐만 아니라 휠씬 더 나쁘게도 우상 숭배의 신전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신전에서의 축제는 우상 숭배와 연관 될 뿐만 아니라 부정한 음란함도 동반한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어떤 법령을 제정하거나 어떤 율법도 언급하지 않음을 본다(고전9장).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 분명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고 했는데 바울은 이러한 말을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10:14)”라고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
바울은 성도들 속에 있는 고상한 기독교의 덕성에 호소한다. 그리고 그는 자비가 최우선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1-33)”
이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상 숭배의 사회로부터 교회가 물리적인 분리보다 영적인 분리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징 계
바울은 사람들이 도를 지나쳐 눈에 띄게 나쁜 위반을 했을 때는 징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 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살후3:14-15)”
그러나 교회가 자체의 책임을 깨닫고 거룩한 몸으로서 행동해 주기를 바랬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
서신서에서 바울은 교회가 어떤 벌칙을 내리라고 이야기하지 않았고 위반자를 복종시키라고 훈계하지도 않았다. 그는 교회가 자신의 의무를 깨닫지 못함을 비난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그리고 자신이 개입하기 전에 교회가 의무를 완수하기를 기다렸다.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후13:2)”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후13:9-10)”
바울이 이렇게 징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이며(행20:28),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엡5:25). 또 하나는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각별한 사랑때문이었다.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안에서 음행에 대한 문제를 엄하게 치리하였다. 이밖에도 바울은 양심을 버리고 믿음이 파선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사단에게 내어 주어 징계를 받게 하고 교회를 훼방하지 못하도록 치리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딤전1:19-20)”
이와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교회를 위해 눈물과 기도로 사랑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죄에 대하여 엄하게 처리했음을 볼 수 있다.
3) 교회 연합
: 바울은 각 교회의 연합을 위해 많은 부분에 있어서 힘을 썼다. 바울은 통일체로서의 마게도냐교회, 갈라디아 교회, 아가야교회, 수리아교회, 길리기아교회, 아시아교회를 말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하노니(고후8:1)”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롬15:26)”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갈1:2)”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16:19)”
사도 바울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중심지에 교회들을 세웠으며 그 교회들은 거대한 통상 루트에 의해 서로 연결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서로 원활한 연락을 주고 받았을 수 있었고, 전도자들은 각 지방을 여행하면서 일생 동안 복음을 전파했다. 성도들은 물론 예루살렘 사자들도 빈번히 각 교회를 거쳐 갔음은 분명하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고후3:1)”
즉 교회는 편지로써 추천하는 제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교회들은 사실상 개인적인 수많은 이해관계의 결속으로써 단합되고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성도들에게 다른 교회가 처한 곤경을 언급하여, 그것을 그들 자신의 것과 대비시키면서 그들의 공통된 분규와 곤경을 서로 상기시켜 주었다. 즉 자기의 일처럼 느끼도록 했으며 같이 기도하고 같이 협력하도록 이끈 것이다. 교회 연합과 화합에 대한 인식을 상시 갖도록 이끈 것이며 문제와 곤경에 대해 서로 문제점을 해결하도록 이끈 것이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1-2)”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히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고후9:2)”
4) 교 육
: 바울에게서 교육이란 사도로서 부름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1:1-2)”
바울은 단지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전도자로서만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설립하고 세우는 데에 또한 전념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개종자들의 처음 시작을 잘 훈련해야 했다. 짐짓 바울에게 집중되고 의존하게 되는 상황이 결과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교사의 권위와 지도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선교사가 움직이고 지시하기만 바라는 모습으로 굳어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립성의 경직은 무기력을 낳고 의존성만 크게 만들어 결국에는 교회의 성장에 장애가 된다.
바울은 한 지역에서 5-6개월 정도 전도한 후 교회를 남겨 두고 떠났다. 계속 지도를 해줄 필요가 있었지만, 그 교회는 성장과 팽창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성령님을 의지하고 떠난 것이다. 예를 들어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중 루스드라에서 6개월간 머물면서 전도하고 교육을 했다. 그리고 장로들을 세웠고 약 18개월간 떠나 있었다. 그 후 두 번째로 그 교회를 방문했지만 단지 몇 개월만 거기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리고 나서 3년 뒤 마지막으로 그들을 다시 방문했는데, 이때도 약 2개월 정도 머물렀을 뿐이다. 그리고 이뿐만이 아니다. 고린도를 처음 방문해 교회를 세울 때 일 년 반가량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3,4년 동안 다시 거기에 가지 않았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15:1-2)”
그리고 바울이 가르친 내용에 대한 부분에선, 설교를 포함해서 바울의 모든 교육적인 내용은 복음에 관련되고 여기에 성찬과 예배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5-17)”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엡3:6-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엡4:20-21)”
또한 바울이 교육하고 세운 장로들에게 교회를 맡긴 것에 대해, 실수했다고 한다거나 후회한다는 언급은 서신서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어쩌면 세운 장로들과 개종자들이 바울처럼 동역자로서 복음전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갸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1:5-8)”
5) 모범을 보임
: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서 지도자로서 먼저 모범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다.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18-21)”
그리고 바울의 삶 자체의 이유와 모범은 예수님이셨고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을 한 것이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행20:35)”
그래서 바울은 나를 따른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임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4:16)”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을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빌3:17)”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살전1:5-7)”
그러므로 바울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고 모범을 따른 것처럼, 그 자신도 모범이 되어 가르치고 나누었던 것이다.
참 고 문 헌
한글 개역 성경
'소논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교사 바울의 기도 (0) | 2009.05.28 |
---|---|
선교사 바울의 삶 (0) | 2009.05.15 |
바울의 선교 전략 (0) | 2009.04.14 |
바울의 선교원리 (0) | 2009.04.01 |
소논문 : 이슬람의 여섯 가지 믿음과 다섯 가지 기둥 (0) | 2008.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