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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교: 하나님은 위로하심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제목 : 하나님은 위로하심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말씀 : 고린도후서 1장 8 - 10 절

본 문 탐 구

신 학 적 적 용

설 교 적 용

고린도후서 1장 3절에서 10절까지는 하나님의 위로에 대한 메시지이다.

3절에서 7절까지 위로라는 단어는 10번이나 나온다.

8절부터 10절까지는 간증문이며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대한 결론부분이다.

8절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과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일이며, 에베소에서 은장색공 데메드리오의 소동들을 말한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이며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여길 정도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이 환난은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이 여기도록 만들었다.

9절 이 환난으로 인해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고 인정하게 해주었으며,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깨달도록 이끌어 주셨다.

10절 큰 사망의 고난에서 하나님은 과거에 건지셨고 현재 건지시며 앞으로 건지실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이 참된 위로를 깨닫는 것이며 소망을 품은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성경의 중요핵심이며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의 큰 줄기다.

죄악된 세상에서 죽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위로하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참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성도의 견인뿐만 아니라 선택에서 천국까지 하나님의 일하심의 모습이고 원동력 중 하나이다.

성화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며, 곧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다. 그리고 이것은 날마다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고난은 인간이 육신의 모습으로 살아 갈 때는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로 인해 성도는 성화의 과정을 굳건히 나아가게 되며, 나는 죽고 하나님이 사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또한 위로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인간의 비참한 현실

: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 세상에서 인간들과 부대끼며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한다. 서로 상처주고 서로 헐뜯고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다.

본문 적용

- 8절~9절상: 아시아에서 당한 환

루스드라에서 돌맞은 일, 빌립보에서 매 맞고 감옥에 갇힌 일, 에베소에서 은장색들의 소동.

이것들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이고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고생이다. 그리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고난이었다.

- 9절하: 고난으로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인간 스스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닌,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이끄시는 은혜였던 것이다.

- 10절: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가 바라봐야 할 것은, 우리를 건지셨었고 지금도 건지시고 앞으로도 건져주실 하나님 뿐이다. 바울이 말하는 참다운 위로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하나님이 주셔야 가능한 것이다.

적용

: 바울이 당한 고난은 지금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고 있는 고난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의 이기심, 인간의 교만, 인간의 배타심으로 인한 고난 가운데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39:7

8절: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절: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절: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여러분, 요즘 뉴스를 보시면 기분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나쁘십니까? 물어보나마나죠. 어렵고 힘들고 아픈 일들만 계속 나옵니다. 좋은 일, 기분이 상쾌한 일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이곳저곳에서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테러다 살인이다, 계속 사람들이 상처받는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경제는 또 어떻습니까? 하루하루가 한숨만 커지게 만들고 이곳저곳에서 원성의 소리들만 높아집니다. 요즘 참 살기 힘듭니다. 뉴스만 보면 걱정이 앞서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시작을 좀 어둡게 시작해서 좀 그렇지만, 오늘 말씀은 이것과 연관되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현실과 나타나는 모습들 그리고 다양한 현상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인간 사이의 일들이 뭐가 있는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제 스스로 골몰하면서 생각해 낸 것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 인간은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남이 어찌 되든 나와 상관없다면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의 이기심. 인간의 이기심은 같은 인간끼리 상처주고 아프게 만듭니다. 나만 생각하고 나만 알고 나만 귀한 줄 압니다. 남이 상처받든 아파하든 내가 아프지 않고 내가 상처받지 않는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프지 않음 돼, 내 가족이 아프지 않음 돼, 내가 속한 회사가 힘들지 않음 돼, 내가 속한 동네가 아프지 않음 돼. 이런 생각이 우리 인간의 마음에 가득하고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티브이에 나오는 가스폭발이나 버스사고에 크게 놀라지 않는 것은 어쩌면 우리 동네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내가 아는 학생들이 탄 버스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두 번째로 인간은 교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에 비추어서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정합니다. 내가 중심이고 내가 리더며, 내가 핵심입니다. 내 의견을 무시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분노하고 화를 내며 공격합니다. 남의 이야기는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내 의견이 무시되거나 내 존재가 업신여기면 참지 못하고 화를 냅니다. 남들 위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남들의 의견이 내 의견과 다르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 의견이 중요하고 내 의견이 맞으며 내 생각이 늘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집 세고 독불장군이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늘 내 할 말만 하고 내 생각만 강요하고 내 의견만 맞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람 참 힘듭니다.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무시한다고 화내고, 악만 써대다 스스로 분노하는 아주 안아무인 같은 사람, 정말 힘듭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교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라고 뭐 특별하겠습니까? 저도 교만함 때문에 화내고 짜증내고 함부로 행동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우리는 짜증내고 함부로 합니다. 어쩌면 지금 여러분 중에는 교회 안 나온다는 남편이랑 한판 한 것이 생각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티브이 보고 있거나 컴퓨터 앞에만 있는 자녀랑 한바탕 했을 지도 모릅니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고 기분이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인간은 배타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부색으로 판단하고 경제적 능력으로 편견을 갖습니다. 나보다 좀 못하다고 생각하면 대하는 태도나 눈빛이 틀려집니다. 어쩔 때는 무시하거나 피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보다 피부색깔과 경제적 능력이 우선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상대가 상처받든 아파하든 상관 않습니다. 정말 배타적인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죄악된 속성 중 가장 하나님을 힘들게 하는 모습 아닐까 생각합니다. 드라마를 봐도 상대방을 생각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차를 타고 어떤 집에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처음 청춘 남녀가 만남을 가질 때도 그 사람의 직업과 수입, 가정 배경과 학력을 따집니다. 물론 이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하나님이 주신 존엄성을 무시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배타적인 모습은 인간들끼리 전쟁하고 살인하고 상대를 미워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존엄성과 소중함을 헌신짝처럼 내팽겨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배타적인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고 경험하고 있으며 어떤 판단으로 살고 계십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인해 열 받고 스트레스 받으며 화를 내고 계십니까? 또 어떤 것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있고 괴롭게 만들며 하루하루 잠 못 이루게 만들고 있습니까? 무시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깔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비싼 차가 없어서, 고급 빌라가 없어서, 맛있는 음식을 못 먹어서 짜증나십니까? 회사가 잘 안돌아가고 직장 상사가 쪼고 있습니까? 성질 사나운 아내랑 집에만 있음 말다툼하고 있고, 무관심한 남편이 말만 하면 무시하고 있습니까? 거기다 자식새끼는 공부는 안하고 컴퓨터 게임만 하고 있고 말은 직싸게 안듣씁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있고 생각만 하면 눈부터 찌푸려집니까?

 

 솔직히 저는 밥 먹을 때가 제일 힘이 듭니다. 결혼 언제 할거냐고 부모님이 잔소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꼭 밥 먹을 때만 그러셔서 요즘 저는 살이 빠지고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각자마다 인간은 아픔이 있고 힘든 일이 있고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행복해 보이는 가정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무슨 일이든지 꼭 문제가 있습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웃는게 웃는게 아닌 상황의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이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고 인간들과 부대끼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로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툭 치면 그 속에 있는 죄속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들은 오늘 본문의 중요한 문제이기에 길게 나열해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바울과 제자들도 겪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모습과 모양과 상태는 다릅니다. 하지만 인간 본연의 모습에서 나오는 죄속성으로 인해, 그들도 고난과 쓰라린 아픔을 경험했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여러분 말씀을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본문 8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이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에 대해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본문의 중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대체 무엇인가란 의문이 생깁니다. 그 이유와 설명은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8절 후반절에 보면, 그 환난에 대해 심한 고생이라고 하고 있고, 살 소망을 끊어지도록 만든 고통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9절에는 사형선고까지 받은 것 같은 두려움과 떨림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또 10절에서는 큰 사망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정말 대단한 고난인가 봅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심한 고생이다. 살 소망이 끊어지는 고통이다.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떨림이다. 큰 사망같은 두려움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찾아보았습니다. 대체 어떤 고난이기에 그 대단한 바울 사도가 엄살 피는 것도 아니고 이런 표현을 썼을까 말입니다.

 

 첫 번째는 사도행전 14장의 사건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을 의미합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앉은뱅이가 있어 바울이 하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낫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신 인줄 알고 제사까지 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이 모습을 보고 너무 하나님께 죄송했고 그들이 하는 행동에 분노해서 옷까지 찢으며 말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복음을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갑자기 나타납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하여 증거하고 있는 바울을 질질 끌고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죽이려고 돌로 쳤습니다.

 여러분, 개처럼 질질 끌려다니는 바울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조금 전까지 은혜가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유대인들이 다짜고짜 때리고 팹니다. 그리고 질질 끌고 다니면서 가진 모욕을 다 줍니다. 나중에는 자기를 사람들 중앙에 세워놓고 소리를 지르더니 돌을 던집니다. 그 상황에 여러분이 계셨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돌에 맞아 보신적이 있습니까? 주먹만 한 돌들을 장정들이 인정사정없이 죽이려고 던지는 것입니다. 머리에 가슴에 등에, 죽이려고 겨냥해서 있는 힘껏 던집니다. 그 돌들을 맞고 쓰러진 바울을 질질 또 끌고 갑니다.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끌고 가더니 던져 버립니다. 이것은 바울이 겪은 일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이 상황이었다면 어떻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도 경험했고 은혜 충만해서 복음도 전하고 있었는데, 복은 커녕 매맞고 질질 끌려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모욕과 수치심을 겪었습니다. 나중에는 돌에 맞았습니다. 정 중앙에서 자기를 벌건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고함치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이제 죽었구나 이제 끝이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돌들이 날라오는 것이 보입니다. 두렵고 떨립니다. 몸이 덜덜 떨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는 천국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과연 어땠을까요? 바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러면, 두 번째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빌립보 감옥 사건입니다. 전도하는 중에 귀신들린 한 여종을 만나, 하도 쫓아다니며 괴롭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한 여종이 이제 귀신에서 벗어나 여자로서 살 수 있음에 기뻐하진 않고, 오히려 이익에 없어짐에 분노합니다. 여종이 사람답게 사는 것보다 자기 돈주머니에 돈이 더 이상 안 들어 온다는 사실에, 더 분노하며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자로서 인간답게 사랑도 못 받으며 살았었는데, 이제야 여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에 오히려 분노하다니, 이건 정말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예 거짓 증인을 세워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법정에 세웁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여기에 로마인 병정들은 한술 더 뜹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차림으로 유대인인 것을 알고는 정당한 절차도 밟지 않고 그냥 때립니다. 기절하도록 때립니다. 단지 로마인이 아닌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말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나라의 사람이고 속국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바울과 실라의 변론은 아예 듣지도 않습니다. 아예 무시한 것입니다. 그냥 끌고온 여종의 주인들 말만 듣고 판단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기절하도록 채찍에 맞습니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지하감옥에 갇힙니다. 손과 발에는 무거운 나무 족쇄가 채워진체 움직이지도 못하고 차가운 돌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것입니다. 그러다 한밤중이 되어 돌바닥에서 습기가 올라옵니다. 피가 나는 상처부위가 벌어집니다. 엄청난 쓰라림과 아픔이 몰려와 바울과 실라는 기절해있다 깹니다. 손과 발에 착고가 채워져 움직일 수도 없지만, 그저 아프고 쓰라려 신음하고 이리저리 움직여 봅니다. 순간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돌맞아 예수님 곁에 간 스테반 집사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런 길을 걸어가셨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스테반 집사의 눈은 돌 맞으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봤었지 하며 되뇌입니다. 다시 힘을 얻고 두 하나님의 사람은 찬양을 하기 시작합니다.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찬양과 기도 소리를 주변에 있던 죄수들이 듣습니다. 어둡고 컴컴하며 아무 소리도 안들리는 고요한 감방 안에서, 바울과 실라의 찬양과 기도는 은은히 울리면서 퍼집니다. 그때 꽈꽈꽝 하고 지진이 납니다. 옥터가 흔들리고 문이 열립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중 두 번째는 이 빌립보 감옥 사건입니다. 억울하게 고소당하고 편견으로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매를 맞은 사건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좋은 일 했는데도 고난만 당한 것입니다. 그것도 기절하도록 매맞았습니다. 편견과 무시와 업신여기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겪었던 것입니다. 정말 힘들죠. 괴롭죠. 더군다나 좋은 일을 했는데 말입니다. 돌아온 것은 기절하도록 얻어 맞은 것 뿐입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이러한 일들은 비일비재한 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 중에는 정말 억울하고 답답하고 무시받는 경우를 받아 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바울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이방우상인 아데미 여신을 섬기며 은장색 실을 직공하던 사람들의 소동과 괴롭힘을 말합니다. 그중 데메드리오가 주동자로 일어났는데, 그들은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을 때리고 함부로 했습니다. 바울과 제자들이 집적 겪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목숨만큼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 다치는 것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더 아프고 힘들었을지 모릅니다. 내가 당하는 것보다 내 자식이나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면 나와 친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정말 힘이 듭니다. 특히 내 자녀가 아픈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때는 정말 뼈가 찢기고 가슴이 베어지는 고통인 것입니다. 바울은 매맞고 끌려다니는 믿음의 형제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무리에 뛰어들려고 했지만 다른 제자들이 붙잡고 말립니다. 아마 다리 끝땡이를 붙잡고 놔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바울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아마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저기 저쪽에서 사람들에 모여서 이러저리 끌려다니고 매맞는 형제들을 바라봅니다.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안타깝고 눈물나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매맞고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바울의 마음도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바울이 겪은 심한 고통은 여기에 있는 것 말고도 더 많습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겪은 일에만 한정했기에 세가지 사건만 나열한 것입니다. 이 이외도 더 많은 일들을 바울은 겪었습니다. 아무튼 바울이 아시아에서 겪은 사건들은 살 소망이 끊어진 아픔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사형선고 받은 두려움과 떨림이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러한 일들을 겪어 보셨습니까? 어쩌면 여기 계신 여러분들 중에는 더한 것을 경험해 보셨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겪은 돌에 맞고 기절하는 것, 억울하게 무시당하면서 기절하도록 채찍에 매 맞은 것, 사랑하는 형제들이 매 맞는 것을 보는 것 보다 더한 경험과 아픔을 겪어 보셨을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뼈를 깎는 고통과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경험 해본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새도록 베개를 적시며 울어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머리가 새하야지도록 고민해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며칠을 방안에 틀어 밖힌채 울면서 밥도 않먹고 슬퍼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추운 겨울에 배고픈 배를 움켜쥐고 쓸쓸히 혼자서 차가운 밥을 울면서 먹어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외도 가정이 겪는 아픔과 사업으로 인한 고통,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인한 상처와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혼자 가슴 앓이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말 못하고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사연과 일들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억울하고 가슴 아프며 가슴이 떨리도록 슬프고 배가 아프도록 울어본 사람들이 정말 많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 마음이 너무너무 아프신 분 혹시 계십니까? 가슴을 도려내는 고통을 참고 계신분이 있으십니까? 하루하루 사는게 정말 힘겹고 혼자라서 너무 외로우신 분 계십니까? 이건 정말 사는게 아니야 하면서 울부짖는 분 계십니까?

 

 우리 답을 찾아야 합니다. 나한테 왜 나한테 이런 일이? 하시기 전에 답을 찾아야 합니다. 왜 나만 이렇습니까? 하시기 전에 답을 찾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 저한테 이렇게 하십니까? 하시기 전에 답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하시기 전에 답을 찾아야 합니다.

 

 9절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다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아멘. 아멘입니까? “이는”부터 다시 읽겠습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예, 답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누굴 의지하라고 하십니까? 그분이 어떤 분이라고 하십니까? 우리는 누굴 의지하면 안된다고 하십니까? 예. 예.

 

 우리 말씀 한 구절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119편 71절입니다. 구약 891,2 페이지 정도에 있습니다. 찾으셨으면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다시한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 가운데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고난으로 인해서, 아픔으로 인해서, 죽을 것 같은 슬픔으로 인해서, 바울은 깨달았다고 합니다. 나를 의지하고 나를 바라보는 것에서, 나를 사랑하시는 분을 의지하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은 아무런 고통 없이 산 사람이 고백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고백은 인간으로서 겪기 힘든 일들을 겪어 본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면서 울어보고 고통 당해본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기 계신 한분 한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괴로울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눈물 흘리며 데굴데굴 구를 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외롭다고 소리치고 원망할 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슴을 줘어 짜며 엉엉 울 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너무 아파요 하면서 저 좀 살려주세요 할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제발 이곳에서 건져주세요 하고 울부짖을 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로 진심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피흘리시며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 지시며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욕을 당하셨고 병정들의 놀림도 참으셨습니다. 왜 입니까?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피를 흘려야 하셨고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 때문에 손과 발 뼈 속에 못을 박으셨습니다. 우리 때문에 창에 찔리셨습니다. 우리 때문에 침을 맞으셨고, 우리 때문에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우리 때문에 살갖이 찢겨나가는 아픔을 견디셨고 그것을 바라보며 아파하는 어머니의 얼굴도 보셨습니다. 왜 입니까? 왜 우리 때문에 피를 뿌리시고, 왜 우리 때문에 모욕을 당하시고, 왜 우리 때문에 배신을 당하셨습니까? 왜 입니까? 왜 우리 때문에 고통을 감당하신 것입니까?

 

 우리가 괴로울 때 건져내 주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플 때 건져내 주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눈물 흘릴 때 건져내 주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바로 우리 때문에 그러셨고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그러셨던 것입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6:32,33

 

 이것이 위로하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 위로하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향한 위로하심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환난은 잠시입니다. 고통은 잠깐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준비하신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늘 함께 하는 평안의 시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고난은 나를 버리게 만들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아픔은 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합니다. 그리고 참 위로를 얻게 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참 위로를 얻게 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이기심, 인간의 교만, 인간의 배타심으로 인한 고난 가운데,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위로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의지하고 인간을 의지하고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가 힘들고 아프고 괴롭고 눈물 흘렸던 때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지금 힘들고 괴롭고 아프고 눈물 나신다면, 역시 하나님의 위로도 함께 계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겪을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로는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절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옛날 죽을 것 같았던 때도 건지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현재 너무 힘든데, 지금도 여러분을 건지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도 항상 함께 계셔 위로를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로함은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가슴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이것을 날마다, 힘들 때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로하십니다. 매 순간마다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순간마다 함께 하셨습니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고 자유의지를 가졌기에 줄을 긋고 붙잡아서 로봇처럼 움직이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건마다 함께 하시지만 인간의 감정과 의지는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순간이든 어떠한 사건이든 하나님은 함께 해주셨고 함께 해주시며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바라봐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위로하심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로하심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정말 사랑하십니다. 주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7

오직 하나님의 위로하심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붙잡은 그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손을 놓아도 하나님은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그 손을 붙잡으시고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