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이상
PAUL'S IDEA OF COMMUNITY
지은이: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는 무어신학교, 시드니대학, 런던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호주의 여러 대학에서 역사, 철학, 정치학을 강의하며 한편으로는 가정 교회의 확장 사역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서문:
바울이 그러했고 저자가 또한 그랬듯이, 본서는 이론을 나열한 것이 아니고 성경과 그 말씀의 실제적인 경험을 토대로 기술한 책이다. 필자는 독자들이 자신의 지역적인 환경이나 특별한 문화에 어떻게 이 원리를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염두에 두면서 바울의 교회관을 가능한한 충실하게 상술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심하며, 실제로 사역현장에서 실현하고 애쓰는 주님의 일꾼들과 성도들에게 큰 기쁨과 확신을 주는 책이 될 것이다.
서 론
바울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이상을 형성시킨 최초의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 당시에 다른 누구보다도 이 공동체 이상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 사람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모든 서신에는 공동체 생활의 여러 면이 논의되고 있고, 어떤 서신에서는 이것이 중요 논제로 등장하고 있다.
바울의 특징적인 공헌은 다른 어떤 면보다 그의 공동체 이상에 있는데 첫째는, 바울의 공동체들의 내적인 역동력이지 공동체의 지체들이 주위 세상에 대해서 가지는 외적인 책임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로, 바울의 접근 방법의 여타 양상들 모두는 자신의 삶을 포함하여 근본적 실제인 복음에 그 모든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제1장 당시의 사회 및 종교적 배경
바울은 30년 동안 넓은 지중해 연안지역을 여러 번 다니면서 다양한 인종과 국가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접하게 되었으며, 여러 사람들의 사상과 제도들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것들에 적응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1세기 중엽의 그리이스-로마세계의 두드러진 특성은 거대한 다양성과 활력에 있다. 비록 로마제국이 그 당시 전 지중해 지역을 지배했었고 헬라문화가 제국의 끝부분까지 침투해 들어갔지만, 각각의 지역적인 통치형태와 생활방식들은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국가의 공적인 공동체와 가정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회계층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초기에 도시국가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찾았던 사람들도 도시국가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다소간 가정 공동체는 도시국가의 권력을 지닌 실제적인 조직체와는 달리 예외적인 특혜를 누렸다. 사람들은 그들이 속한 큰 공동체에서 찾을 수 없었던 것들을 그들이 생활하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 찾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들을 그렇게 좁은 영역에서 오랫동안 만족시킬 수 없었고 또 다른 사람들의 희망은 그들 자신의 종속적인 위치 때문에 좌절되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사람들의 열망이 가정에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일부 더 신중하고 경건한 사회구성원들은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사해동포주의적인 질서를 지향하며, 생활해오던 도시국가의 공적인 생활 그 이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다양한 단체들의 종교적이었던 것들을 살펴보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에 대해서 불만이 편만해 있었고, 이에 대한 반항으로 전통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이것은 사해연안의 쿰란공동체나 유대 도시들과 식민지의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던 에쎄네공동체가 택한 길이었다. 이러한 단체들과는 별도로 유대교 안에는 종교생활과 공동생활의 중심이 되는 회당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전통종교로부터의 깨어남은 헬라인과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바울 당대에 철학들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사람들 내부의 공동체 의식을 사로잡았던 것은 스토아철학이었다. 그리고 어디에도 동조하지 않는 순례자들인 견유학파도 있었다. 또한 동방에서 서방의 지중해 연안지역으로 유입되어온 여러 신비종교인 밀교 혹은 비밀종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바울이 접촉한 새로운 종교단체들과 얼마나 접촉하였을까? 디아스포라 출신인 그가 회당생활을 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헬라의 신비종교 및 철학자들과도 많은 교류를 통하여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며, 당대의 고대사회에서 상이한 자발적 종교단체들이 존재했음을 볼 때, 한편으로 그들과 함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출현했다는 것이 특별히 신기할 것은 없다.
제2장 혁신적인 자유의 도래
바울의 공동체 사상은 대부분 자유에 대한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자유나 구원에 관한 바울의 이해가 그의 공동체이상과 밀접하게 관련지어져 있다. 그는 구원을 단순히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로만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은 아무리 그 일을 개인적으로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는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자유란 예수의 영을 자신들의 삶에 받아들인 자들이 이전에 그들을 꼼짝못하게 사로잡았던 것들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자유가 있는데 이 자유는 두려움을 쫓아내며 가장 친밀한 분 앞에서 자유하게 한다. 이것은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게 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자유를 갖게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자유로 말미암아, 그동안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로 옮겨졌을 뿐 아니라 그 새로운 공동체를 넒히고 심화시키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바울의 생각 속에 있는 자유와 공동체 사이의 완전한 연결이 다시 한 번 분명해진다.
자유에 대한 1세기의 다른 견해들을 살펴보면 바울, 바리새파, 쿰란공동체 모두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주된 관심사이지만, 서로간의 강한 책임감을 가진 공동체들을 형성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바리새파와 쿰란공동체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에서의 자유와 율법에 근거한 인간의 노력으로 얻게될 자유를 설명하고, 뿐만 아니라 미래의 메시아가 출애굽 사건보다 더 확실한 자유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토아학파는 분명히 자유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자유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을 통하여 발견되고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성령 즉, 그리스도의 마음을 통해 소유된다. 밀교의 자유란 운명으로부터의 자유 및 육체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자유는 개인을 압도하여 적어도 일시적으로 신령한 능력을 주입하는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바울의 자유관과 밀교의 자유관이 둘 다 집단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지만, 밀교는 기본적으로 의무보다는 이익공동체에 바탕을 두고 있고, 서로 섬기는 것보다는 공동의 제의을 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바울의 자유에 대한 독창성은 도덕적․법적 규율, 절제, 자아포기보다는 사랑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유대교나 헬라철학의 자유개념과는 구별된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다음 세 가지 주요한 요점으로 구성된다.
독립(Independence)
․죄, 율법, 사망, 다른 세력 등과 같은 어떤 것들로부터
․의, 예수님과 그의 고난을 본받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을 위하여
․자유를 개인적으로 생명감 있게 체험하는 결과를 낳는다.
의존(Dependence)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인류의 노예상태를 끝나게 하신 그리스도께
․그리스도의 생명과 목적을 전해주는 성령께
․내적인 가능성보다는 신령한 은사를 받게 됨
상호의존(Interdependence)
․다른 사람과, 왜냐하면 자유는 섬김으로 인도하며 또한 다른 사람의 필요와 관계될 때
실제적으로 규정될 수 있기 때문에
․세상과, 우주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변형되는 자유를 경험할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우주적 차원과 개인적, 하나님 중심적 차원에는 자유를 준다.
제3장 가정모임으로서의 교회
에클레시아’란 단어는 본래부터 종교적인 의미를 전혀 갖고 있지 않고, 그저 단순한 뜻에서 사람들의 모임이나 회합을 의미한다. 바울은 ‘에클레시아’란 단어를 사람들의 실제적인 모임 혹은 정기적으로 구성되는 만남으로 모이는 무리에만 적용될 수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이것은 오늘날 사용되는 것과 같이 보다 큰 단위의 부분으로서 인식되는 수많은 지역 회중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장소에 관하여는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고전 16:19)라는 말에서 집이라는 장소를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의미할 수 있다. 오이코스 즉 집이란 말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사는 거처이든지 혹은 그들의 책임하에 있던 권속이었을 것이다. 만약 전자를 의미한다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가정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 전부 혹은 일부분이 모였던 모임 장소였을 것이다.
이러한 모임의 그룹들은 다양한 종류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주인을 섬기는 종들로 구성된 무리들을 말하는 것이든지 혹은 함께 일하는 동일 길드(장인, 상인의 동업조합)의 회원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그룹들은 어떤 가정이나 혹은 길드에 속해 있으면서 서로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내며 아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생활의 일부로서 함께 교제하곤 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초기 그리스도인 모임의 때와 빈도에 관해서 거의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주 모임을 갖지는 않았음을 암시해준다.
이 용어가 그리스도인들이 만나는 건물을 부르는데 결코 쓰여진 적이 없다. 한 도시의 단지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만 모이는 작은 모임이건 전 그리스도인이 모이는 큰 모임이건 간에 그 중의 한 성도의 가정에서 ‘에클레시아’는 열렸다. 예를 들면 ‘다락방’ 같은 곳에서이다. 주후 3세기까지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위한 특정한 건물이 건축되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모이는 사람들의 수에 제한이 있었다. ‘온 교회’가 모이는 경우는 40-45명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며, 평균 30명 정도였다.
제4장 하늘의 실제로서의 교회
바울의 후기의 글에서는 ‘에클레시아’에 대한 이해가 더 확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에클레시아’라는 용어와 함께 사용한 ‘엔 크리스토’(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용어는 그리스도 공동체보다는 주로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염두에 두고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있을 때만 그리스도와 상관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역모임에 연관하여 쓰여졌던 ‘에클레시아’의 의미가 더욱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바울이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지속되는 하늘의 교회와, 정규적으로 모이기는 하지만 성격상 간헐적일 수밖에 없는 지역교회에 동시에 속해 있다. 그러면 이 두 교회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 도시에 여러 모임이 있을지라도 각 모임들은 그곳 교회의 일부가 아니라 그곳에 모이는 각각 독립된 교회들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지역 교회들 각각이 하늘의 교회의 실체를 표현하며, 성격상 본질적으로 영원하며 무한한 것을 시간과 공간 안에 나타내 주고 있음을 뜻한다.
바울이 살았던 시대적인 맥락에 비추어 당시의 지적, 사회적 분위기에 견주어서 그의 ‘에클레시아’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면,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비교적 적은 무리로 정규적으로 모이는 자발적인 연합체 이다.
그것은 가정 단위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정의 특성도 가지고 있었다.
이 작은 지역 모임들은 초국가적이며 시간에 매여있지 아니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오직 바울이 통찰한 ‘에클레시아’에 대한 개념만이 그 당시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을 헌신할 수 있는 이 세 가지 이상을 모두 함축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접근법은 1세기의 다른 경쟁 그룹들을 압도하는 결정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공동체가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역동력의 원천과 모임의 특성보다 더 그들 모임을 구별되게 하는 요인이 되지는 못했다.
‘에클레시아’라는 이 용어의 가장 중요한 점은 공동체 생활에서 모임이 핵심인 것을 강조하는 데 있다. 즉 공동체가 생겨나고 지속적으로 재창조되는 것은 모이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5장 한 가족으로서의 공동체
바울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적용한 여러 비유들 중에서 ‘건물’로 비유하여 성전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한 ‘가족’으로 비유한 것은 다른 어느 비유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가족’에 대한 바울의 모든 용어들은 그리스도와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신성한 가족의 일원으로 여겨야만 한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친밀한 용어인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지역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지체들로 여겨야 하고. 지역모임이나 하늘의 ‘회중’을 다 똑같이 하나님의 동일한 가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바울이 ‘형제들’용어는 그가 공동체들의 지체들을 지칭한 방식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그와 여러 공동체와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아비’, ‘어미’, ‘유모’ 등과 같은 가정관계의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이런 용어들을 사용하기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어떠했을까? 이스라엘을 ‘식구’라고 말하거나 그 지체들을 ‘형제들’이라고 하는 예가 구약 어디에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부른 적은 없다. 헬라 사람들은 정치단체나 친구들을 때때로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쿰란공동체와 바리새인들에게 형제에 관련된 언어들은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오지 않는다. 견유학파 철학자도 종종 ‘아버지’ 혹은 ‘유모’로 묘사되기도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씀하시기를,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4,35)고 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의 중심에 ‘사랑’을 놓으신 분이시다.
가족비유가 바울에게는 지극히 중요했다. 그는 공동체의 모임을 가족적인 맥락과 분위기로 이끌며 그 지체들간의 관계를 가족간에 사용되는 언어들로 기술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주어진 가족적인 특성은 공동체 지체들의 가정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대(끈)를 표현하는데 가장 적절한 분위기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제6장 몸으로서의 공동체
바울은 공동체를 가족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몸’에 비유함으로써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은사들의 성질과 사용 및 그것이 나온 원천에 대하여 주의 깊게 진술한다. 바울은 인간의 몸을 비유적으로, 거의 풍유적으로 취급하여, 이 몸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상관짓는 유추를 여러 상이한 용어들로 묘사한다(고전 12:12-30). 이 구절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묘사된 것은 바로 고린도에 있는 지역 공동체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각 지체는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을 섬기도록 되어 있다.
덜 귀해 보이는 섬김을 수행하는 지체들이 가장 존귀하게 여김을 받음이 합당하다.
공동체의 지체간의 연결관계가 너무나 밀접하기 때문에 한 지체가 온 지체에게 영향을
미친다.
공동체와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의 친밀함이 강조되고 있으나 그 성격은 실제적으로 상술 되어 있지는 않다.
바울의 후기 글에서는 그의 ‘몸’비유에 어떤 진전이 발견된다.
(1)비유사용의 발전
이 비유의 사용이 어떤 식으로 발전되는가?
초기 서신에서 몸은 지역교회 안에서의 더 넓은 관계를 말하며, 후기에는 ‘에클레시아’를 말한다. 이것은 이 비유를 적용하는 폭이 좁아진 것이 아니라 넓어진 것을 의미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초기 글보다 더 충분하게 밝혀지고 있다. 전기에서는 공동체 가 머리를 포함하여 온 몸을 구성하고 있는데 후기에서는 그리스도가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후기 서신들에서는 이 비유가 연장되어 교회 안의 인종구성을 포함하여 그 이상으로 유대 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창조된 새사람이라는 것까지 나온다.
지체들의 상호기여에 대해서는 연합에 따르는 상호의존성보다는 지체가 단체적으로 성장 해야 한다는 것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 성장은 그리스도 자신에까지 이르는 끊임없 는 완성이며 그분이 제시하는 지적이며 도덕적인 수준까지 이르는 것이다.
(2)비유내용의 한계
공동체와 세상과의 관계는 ‘몸’이라는 용어를 직접 설명되지 않는다. 바울의 글에는 믿는 자들의 모임이 세상을 직접적으로 상대해서 기능했다고 암시하는 곳이 아무데도 없다. 이 비유는 기본적으로 각 지체들간의 상호작용을 말하는 것이지 외인들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와 공동체가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기본적이지만 간접적인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3)몸 비유의 적용
바울이 공동체를 ‘몸’으로 말할 때, 그는 몸 안에서의 불일치의 가능성에 대응하여 그 틀을 제시한 것이다. 바울에게는 편당이라는 말이 교회들 사이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한 한 공동체 안에서의 분열을 뜻하였다. 편당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바울은 공동체의 지체들이 동일하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용납되어진 것과, 복음에 합당한 사랑과 연합을 추구한다는 것을 나타내리라고 말한다.
(4)몸 비유의 독창성
유대문학에는 이와 똑같은 것이 전혀 없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단체적인 인간성의 개념이 나오지만, 이것은 유대인이 생각하는 몸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소개하는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이었다. 몸이라는 말이 바울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몸 비유를 큰 국가 안에 있는 한 공동체에 그리고 외부적인 의무보다는 서로에게 대한 개인적인 의무에 적용시킨 최초의 사람이었다.
제7장 성장에 있어서의 지적인 요소
공동체를 ‘몸’으로 표현하는 바울의 묘사는 공동체의 목표가 단지 지체들간의 조화를 창조하는데 있을 뿐만 아니라 성숙을 향한 발전에도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의향은 단지 성숙한 개인을 형성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성숙한 공동체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이러한 변화와 성장에 성령은 어떤 방법으로 공동체의 각 개인과 접촉하여 그들을 성숙하게 하는가?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믿음이다. 한 사람이 그리tm도인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의 시작은 오직 믿음으로부터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다.
공동체 내에서의 성장은 오직 그 지체들의 지식이 증가되어지고, 풍성하여지고, 새로워지고, 가득 채워질 때만이 이룩된다고 바울은 말한다. 또한 지식의 중요성은 믿음, 소망, 사랑과 지식의 관계를 보다 깊게 관찰할 때 드러나 진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경험 중에서 이 셋은 가장 오래 지속되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은 믿음을 통해 들어오며, 또한 그를 성장하게 한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마음이라는 표현으로 요약한다(갈 5:6). 믿음, 소망, 사랑에 관한 한, 지식이 그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바울의 공동체 삶에 있어서도 지식이 중심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된 지식의 위험을 더욱 실제적으로 나타내준다. 그리고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그의 서신들 속에 언급된 지식에 대한 여러 가지 방해요소들을 파악해야 한다.
(1) 밀교
밀교들은 초자연적인 세계의 진정한 특징을 드러내고자 하며, 또한 그것이 비이성적인 수단으로만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지식은 ‘성체의 환상’(vision of divine)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2) 스토아학파와 견유학파
바울이 스토아학파나 견유학파가 말하는 이성적 행동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이성의 활동은 신령한 것들에 대한 참 깨달음을 얻는데 실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과 반대로 그는 신령한 지식의 근원으로서 계시와 직선적인 제시(계시)를 강조한다. 어쨌든 바울과 이들 학파의 차이는 분명히 각자의 믿음관 및 믿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있다.
(3) 유대교
유대교 교사들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의 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수건이 오리려 그 마음을 덮어 진리와 지식의 참 의미를 알지 못했다(롬 2:17-21; 고후 3:14, 15).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을 무시하고 율법의 문자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쿰란공동체 내에서의 지식에 대한 접근방법도 이와 비슷하게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지식이며, 그 지식의 내용은 하나님의 모든 뜻이고 그 진정한 원천은 하나님이다. 그러한 지식은 오직 성령에 의하여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알려질 수 있다.
제8장 교제에 있어서의 신체적, 물질적 요소
바울이 삶과 그의 행동 속에 생각과 말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육체적인 존재라는 그의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사람은 단순히 육체적인 형태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바울의 공동체들 안에서 단순히 말만 아니라 육체적인 행동이 나란히 잡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 침례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신체적인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체험의 하나가 침례이다. 바울이 믿음을 침례와 연계시킨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각 개인의 실제적 헌신이 침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전 인격과 하나님의 창조물인 물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침례는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또는 그 가족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이처럼 침례는 필연적으로 한 공동체에서 다른 공동체로,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2. 안수
안수는 본질적으로 원하는 바를 성취케 하는 규정된 기도이다. 이 행동은 단순히 기도에 수반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 자체의 한 부분이다. ‘안수하여’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다’(행 14:26; 13:3)라는 표현과 동등하게 쓰이고 있다. 안수는 침례에서처럼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지체들과도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안수를 통해 단순한 기도 이상으로, 해당문제를 놓고 각 지체들과 함께 교제하게 되는 것이다.
3. 함께 식사함
공동체가 서로 교제를 나눔에 있어서 가장 가시적이고 깊은 것은 지체들이 함께 나누는 공동식사이다. 만찬은 본질적으로 식사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 식사의 선례는 유월절 식사이다. 이도 역시 가정에서 이루어졌고 또한 종교적인 유산의 기본요소로서 소년소녀들의 교육이 포함되었다(출 12:21-27). 이 식사 자체가 이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시적으로 선포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에 의한 제자도에로의 부르심인 것이다. 이 점에 좀더 유의하여 생각해 보자 바울에게는 ‘이것은 내 몸이다’(고전 11:24)라는 말이 ‘이것은 너희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린 나다’라는 의미였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라는 말은 ‘나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너희 사이에 세워진 새로운 관계이다’라는 의미였다. 공동체가 유지되고 그 생활이 깊어지는 중심적인 행위로서 가장 충분하게 표현된 것은 주의 만찬이다.
4. 입맞춤
이 행위는 초기 공동체 삶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행위로 말미암아 공동체의 각 지체들간에 유대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 되었다. 입맞춤을 교환하는 것이 유대인 회당이나 쿰란에서는 이것이 실행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그러나 동방사회에서는 친척이나 친구, 친절을 베풀거나 대접을 받는 사람들간에 특별히 이것이 일상생활의 일부였다(눅 7:45). 교회에서 지체들이 ‘서로 문안하는’ 것과 같은 공동체적 특성이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5. 소유를 나눔
소유를 나눈다는 말은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풍성함’과 ‘부요’를 궁핍한 자들과 나누라는 말이다(고후 8:14; 고전 16:20). 믿는 자들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십자가를 통하여 보아야만 한다. 또한 그는 그것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느껴야 하며 자기의 소유를 다른 이들을 섬기는 자원으로 삼아야 한다.
제9장 은사와 사역
교회의 목적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서로에게 주신 섬김을 통하여 그 지체들을 세우는 데 있다. 이것은 자신들을 위하여 섬겨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표현하며 그와 함께 누릴 미래의 소망을 새롭게 하는 식탁교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서로 은사를 나누는 것을 주로 하는 다른 모임도 있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모임은 서로서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섬김을 실행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모임이었다.
바울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전 구원활동을 은사라는 용어를 통하여 이해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양자됨, 영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 그리고 예배와 약속들이 바로 그것이다.
‘카리스마타’의 본질
(1) 개방적인 성질이 있다.
(2) 개인적으로 분배되지만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3) 그 효과에 따라서 순위가 정해짐
(4) 정기적으로 뿐만 아니라 일시적으로 발휘됨
(5) 은사는 새로운 성격을 가지며 기존의 인격을 새롭게 함
(6) 각각의 다양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활용됨
제10장 은사와 질서
공동체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은사들과 ‘탁시스’(질서)라는 말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은사가 근본적으로 개인의 즐거움을 위해 주어지는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다고 말한다. 교회 안에서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이 교회를 위해 세운 기본원칙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는 것이다(고전 14:26).
(1) 균형있게 행사함
(2)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활용
(3) 분별있게 평가하면서 활용
(4) 각 개인의 절제하에 활용
(5) 사랑의 틀 안에서 활용
지금까지 주로 은사들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아왔지만 이제는 은사들이 알맞게 나타나도록 성령이 주권적으로 통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 보자. 성령의 주권으로 인해 공동체 안의 은사는 다소 안정되게 분배되며 모임 중에 질서있게 나타난다. 공동체 모임에 있어서 합당한 하나의 질서란 없다. 그런 것은 심령의 자유함을 제한하고 그 공동체의 다양성을 감(減)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조는 공동체 안에서 표현되는 은사들과 그것들이 행사되는 질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바울의 공동체 이상이 지닌 독창성에 있어서 바울의 견해와 동시대의 그것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해 좀더 자세히 밝혀보면, 먼저 ‘연합체’와 ‘가정’이라는 개념을 통합시켜 ‘교회’를 이해하였으므로 그의 견해는 헬라, 로마 및 유대의 종교단체들에게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넓은 범위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교회 안에서의 연합 및 사역과 질서에 대한 그의 이상은 그 시대의 다른 견해들에 비해서 분명한 강조점이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더 큰 차이점이 있다. 쿰란공동체와 바리새파 등과 같은 유대종교단체들의 구성원들에게 있어서는 모세오경에 나타나 있는 것 같은 어떤 규례(성경낭독, 강론, 신앙고백, 기도)가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헬라종교 단체의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그 종교단체의 회합은 신비적인 감정은 물론 극적인 제의와 진행절차를 가진 의식숭배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바에 따르면 그의 공동체회합은 상호간에 말과 행실로 나타나는 교제가 중심이 되었다. 그것은 개인과 하나님 사이 및 개인과 그의 동료사이에서 이미 체험된 화핼ㄹ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제11장 지체들간의 다양성과 그 조화
바울은 사람들을 서로 나누는 차이점들에서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 즉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괴리와 그분께 그들이 응답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바울은 국적이나 사회적 지위나 성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계속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공통된 구원을 함께 나누어 가진 자들이다. 개인의 국적이나 유산, 개인의 사회적 지위도, 그리고 성적인 차이도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이에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종이나 자주자, 남자나 여자 사이의 평등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더 강조한다. 바울은 복음이 가져다 주는 평등보다는 일치에, 또한 어떤 새로운 획일성이 생성되는 것보다는 이러한 일치 속에서 다양성이 보존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이 다양성은 그러한 각 그룹들 사이의 차이들이 바울의 공동체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지속적으로 담당해 왔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증명되어질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서 전적으로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주로 이방인이 구성원으로 된 공동체로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비록 일시적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장소가 될지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미래의 임무를 여전히 간직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제각기 독특한 종교 및 문화 배경 하에서 개종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갖게 되었다.
공동체 내에 지적, 정치적, 사회적 차이들이 만들어져서는 안되지만, 이처럼 공동체 생활에 사회적인 차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아가서 계층간의 차이도 여전히 보여졌다. 그러나 사회적 특권은 더 이상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의 차별의 표시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상대를 섬기는 기회가 되었다.
제12장 교회내에서의 여성의 위치
바울의 교회들 안에서 여성은 어떤 역할을 담당했을까?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받아 보는 공동체의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편지의 수신자로 생각했다. 바울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공동체 삶의 이러한 부분에 참여하며 모임의 훌륭한 질서와 복지를 위해 기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고린도 교회의 모임들에서는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하는 일이 통상 있는 일임을 알 수 있다(고전 11:5). 이런 자유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교회 안에서 지녀야 할 태도에는 분명한 제한이 있다고 바울은 주장한다.
(1) 외모:여자의 머리는 길게 머리를 기를 것을 바울이 요구하고 있다(고전 11:14).
(2) 결혼생활:확실히 아내의 외모는 그녀가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나타내 주었다
(고전 11:7).
(3) 교회생활:교회 내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
바울은 여성의 탁월성을 인정함에 있어서 ‘뵈뵈’(롬 16:1)를 여자 후원자로서 바울의 사역에 함께 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외에도 바울의 공동체들 안에서 여자도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골 3:16).
일반적으로 에쎄네파와는 달리 쿰란 공동체는 여자도 그 공동체 삶의 주변에 보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남성사회였다. 유대교와는 달리 밀교의 핵심적인 의식과 체험은 여자들에게 강한 매력을 갖도록 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공동체 안에서의 외국인, 노예, 여자의 위치는 유대교 안에서의 그들의 위치보다 일반적으로 더 낫고, 헬레니즘적 밀교의 경우에 보다 가깝다. 바울은 공동체 내의 구성원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과 함께 다른 계층간의 국가적, 사회적, 성적 차이가 자연스럽게 지속되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 참된 다양성을 산출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차이가 구성원들 간에 형식적인 구분을 짓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특별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공동체 내의 유용한 봉사를 하게 하는 강력한 발판이 된다. 종교적인 평등은 어떤 경우에든지 구성원 상호간의 새로운 조화를 이루는 목적에 종속되는 만큼 공동체 내의 기능적인 다양성은 그대로 존재한다.
제13장 공동참여와 공동책임
각 개인이 받은 새로운 은사들과 새로운 책임이 특권이나 자격의 성격을 띠어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1) 제사장(성직자)과 평신도
바울서신의 가장 특징적인 사실 중의 하나로서, 그가 ‘히에레우스’(제사장)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투르기아’(제사장의 봉사)라는 용어나 혹은 이와 같은 어원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결코 특정한 특권계급이나 제사의식의 행위 혹은 그 의식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울에게는 모든 개개인, 전체로서의 공동체, 혹은 세속적인 관원들 모두가 바로 ‘제사장들’인 것이다. 종교적인 헌신, 자선행위 및 삶 전체를 헌신하는 것 등도 하나님의 새롭게 요구하시는 ‘제사장의 행위들’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제사장과 평신도, 중재적인 봉사와 일반적인 봉사, 제의적인 활동과 일반적인 활동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2) 직분을 맡은 자와 평범한 자
바울은 공동체 내에서 직분을 맡은자와 평범한 자 사이의 어떠한 형식적 구별도 역시 배제하고 있다. 바울은 교회 내의 각 지체들의 섬김(봉사)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용어로서 바울서신 전반에 걸쳐 거의 일관되게 사용된 말은 ‘디아코니아(봉사, 섬김)라는 말이거나 혹은 이 말과 관련된 형태의 말이다. 바울은 전적으로 일상적인 의미를 가진 특별한 신성함이나 지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말을 선택하고 있다.
(3) 거룩하게 구별된 자와 일반 구성원
바울은 공동체의 각 지체들이 지니고 있는 ‘거룩함’(경건함)의 척도에 따라 사람을 구분짓는 것을 거부한다. 제사장이나 직책을 가진 자 같은 공동체 내의 지도계급을 배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영적인 특권계급도 배제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공동체 이상에는 제의나 직책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지체들을 구분짓는 전통적인 구별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의 책임의 문제에 관한 바울의 견해를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해 볼 수 있다.
공동책임에 대한 바울의 강조
(1) 조직에 대한 책임
(2) 복리를 위한 책임
(3) 징계에 대한 책임
(4) 성장에 대한 책임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보아온 공동체 삶의 각 영역에 있어서, 모든 지체는 다 공동체 인도의 중요한 책임을 갖는다. 한 사람이 인도하고 나머지는 그 결정을 단순히 따라가기보다는 오히려 참여하는 것이 모든 지체의 공동책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공동체 삶의 보다 친숙한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한편 ‘동등함’에 관한 바울의 개념은 보다 근본적인 개념인 ‘조화’에 종속되어 있다. 바울은 이 동등함만이 타인과의 조화에 이르는 유일한 관문이라고 여겼다.
제14장 공동체 내의 위치와 기능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집회에 참여하고 공동체의 업무에 대해 책임을 갖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이 교회 생활의 행정적, 목회적, 지도적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들을 살펴보자. 이 점을 살펴보기 전에 바울이 자기 편지의 수신자들을 보다 신령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분리하고 있는 광의적 구분에 대해 알아보자.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깨달음과 관련하여 성숙하고 강한 자와 세상적이고 약한 자들을 구분하고 있다. 바울에게는 이런 차이가 공동체 구성원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바울은 특별한 사람들의 역할을 표현하는데 사용했던 용어들을 살펴보면 너희 가운데 수고하며, 주안에서 다스리며(도움을 주며), 권하는 자들이다. 너희를 다스리는 자, 도움을 주는자, 동역자, 일꾼, 가르치는 자, 등을 사용하고 있으며, 직책에 대한 견해는 집사, 감독, 목사, 성도라는 단어가 제기되고 있다.
우리는 바울의 공동체가 계층적 구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한 사람에게나 혹은 일단의 한 무리에게 나머지 사람들의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식의 일을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공동체는 평등주의를 실행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의 공동체가 특정 사람들을 선발하거나 불러서 전체를 대신하여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운영하도록 하지도 않았다. 대신 바울의 공통체는 구조상 신정적(theocratic)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공동체에 두드러지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권위는 공동체 내의 위치나 외부의 지위 또는 그들의 엄청난 부(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지 공동체 내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사역에서 파생된 것이다.
제15장 바울의 사역의 인적 구조
바울은 동료 사도 및 수종자와 함께 선교사역을 시작한다(행 13:2-4). 초기에 그는 보조자로 후에는 선임자로서(행 13:13)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제2차 전도여행에서 그는 자신의 조력자를 고르고 디모데를 시작으로 보조인원을 모집함으로써 그의 선교단의 구성원을 확장시켜 갔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그에게 제공된 늘어나는 재정적 지원과 환대는 중요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필요였다. 바울의 서신에서 1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행 18:8) 그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후원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서신은 이러한 사람들의 후의에 대한 감사의 말로 가득 차 있다. 때로는 바울이 혼자서 여러 상황을 다루어야 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는 주위에 동역자들의 무리를 대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동역자나 협력자인 또 하나의 무리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전통적인 인종적, 사회적, 성별의 차이가 그의 선교단의 구성원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유대인과 이방인
바울의 사역에 보다 직접적으로 참여한 후원자의 대부분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회심자들이었다. 그러나 초기의 선교팀이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으로 편중되었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이방인의 참여를 간과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 중에 디도와 두기고(행 20:4; 골 4:7; 엡 6:21) 등은 잘 알려진 이방인 참여자이다.
(2) 노예
바울과 함께한 자들 중에는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을까? 노예 오네시모(골 4:8,9; 몬 10)가 그 유명한 예이다. 오네시모로 하여금 빌레몬을 섬기는 일에서 자유케 함으로써 바울을 자유롭게 돕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선교사업에 관련된 여러 실제적인 일을 수행해 나감에 있어서 자신의 종을 두기를 거절해 왔다. 또한 브리스길라에게서 순회하는 동역자로서 남편과 더불어 활동한 기혼 여성의 예를 볼 수 있다.
바울이 자신의 선교단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합시킨 점과 또한 수종들 노예를 동반하지 않고 여행을 한 점은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을 고려할 때 특별한 것이었다. 유대인과 비유대인들이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는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었지만, 종교적인 사상이 관련되어 있는 한 이들이 함께 결합한 전례는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선교단은 그가 세운 교회의 구성원과 같이 그 당시의 여러 국가적, 사회적, 성별적 협력의 다양한 상호교류에 부분적으로는 대립하고, 부분적으로는 이를 반영하고 또한 부분적으로는 이를 확장시켰다. 그가 종들의 시중을 명백히 거절한 것도 흔치 않은 일이지만 그의 동역자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것은, 그의 유대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헬라사회에서만 살펴보아도, 그의 가장 모험적인 실행인 것으로 여겨진다.
제16장 바울 선교단과 지역교회
바울 선교단의 구조는 그에 의하여 설립된 교회들의 구조와 어떤 유사점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첫째, 아버지, 아들, 형제, 자매,등과 같은 가족 용어를 집중적으로 사용한 점. 둘째, 은사와 직무와 다양성. 셋째, 바울이 그의 구성원들을 지칭할 때 나오는 평등주의적인 강한 어조, 즉 동역자들, 함께 된 종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세 가지 유사점들과 함께 사역팀과 교회들 사이에는 어떤 실제적인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우선 바울의 모든 운영방식은 전문화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특수하고 한정된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 선교팀의 일차적인 목표는 구성원들을 공동생활 안으로 연합시키거나 그들의 성숙을 돕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구성원들과 같이 바울 선교팀의 구성원들도 은사를 소유할 뿐만 아니라 성숙해 있어야만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몸’비유가 이 선교팀의 무리에게 적용된 경우를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은 공동생활에 참여하기보다는 주로 공동의 사역을 나누어 가지는 식이었다. 선교팀의 구성원들은 내부지향적이라기보다는 외부지향적이었다. 그렇지만 교회와는 달리 이 공동체는 초점을 사람들의 무리에 두지 않고 바울 한 사람에게 두고 있다.
셋째로, 은사들의 다양성이 있긴 하지만 바울 선교팀의 경우 회중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안에서는 그리스도인 무리들보다도 외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은사들이 훨씬 뚜렷하다. 여러 지역에서 교회가 설립되어감에 따라 구성원을 세워주는 일이 중요한 일면을 차지하지만, 교육보다는 복음전파가 일차적인 일이다.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은 그 무리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 선교팀의 활동은 개인의 권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권위가 귀속되는 곳은 사도를 포함하여 궁극적으로 전 회중이지만, 그의 사역팀에서는 성령아래 있는 바울이 명확히 ‘책임자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울 선교팀과 그의 교회들 간의 상호관계에 있어서는 그들이 상이한 방향에도 북구하고 ‘사역팀’과 ‘교회들’은 여러 방면에서 각각 서로의 활동에 참여한다. 바울과 그 선교팀의 멤버들은 자신들이 세운 작은 공동체들을 양육하여 그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려고 노력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교회와 사역, 이 두 가지는 결코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어디에서도 그의 선교활동을 에클레시아로 보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이 선교단을 흩어져있는 공동체들과 나란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 선교단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복음전파와 교회설립이며 또한 이 교회들에게 도움을 주어 성장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이 교회들에게 도움을 주어 성장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의 선교단은 지역 공동체와 상호관계를 분명히 갖고 있으나 조직적으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관계하며, 그 공동체를 지배하거나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봉사적인 것이다.
제17장 사도바울과 그의 공동체
크고 작은 범주의 ‘동역자들’ 집단 안에서 바울의 권위 문제에 사도 자신의 권위 문제로 관심을 돌려보자. 먼저 다른 세 집단과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즉 선교단의 직속 동역자들에 대한 그의 권위의 성격, 예루살렘에 있는 원사도들(Original Apostles)과 관련한 그의 위치, 끝으로 그의 사역을 집요하게 침식해 들어오는 다른 사도들을 향한 그의 태도가 그것이다.
바울의 직속 동역자들에 대한 바울의 권위에 있어서는 디모데나 디도 같은 동역자들은 바울의 사역팀 안에서 가장 탁월한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들을 향하여 권위주의적 태도로 행하지는 않았으며, 인격적인 관계가 가족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사도들과 바울의 관계 역시 바울의 사역과는 다른, 그들 나름대로의 사역과 선교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바울이 이방인에게 가도록 부름을 받기 전에 할례자를 위한 복음을 위탁받았다. 아볼로도 주로 유대인에게 집중했던 것 같다. 하지만 베드로와 아볼로는 자기들이 세우지 아니한 교회들에게도 종종 기여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세우지 아니한 교회 안에서는 특별한 자신의 위치를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사람들외에 바울의 공동체들과 함께 했던 다른 순회사도들이 있었다. 특별히 갈라디아지방과 고린도에서는 이러한 일이 혼란을 일으켰다. 그 지역의 사도들은, 바울의 시야에는 진정한 사도들이 아니었고, 바울은 이 거짓 사도들을 심하게 경멸했으며, 교회들이 경계해야만 할 거짓된 반대자들이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의 교회에 대해서는 어떤 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는가? 우선 바울은 그와 그의 교회와의 관계를 가족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즉 그들을 낳은 ‘아비’라든가, ‘어미’ 혹은 그들을 돌보는 ‘유모’등의 말들이 그것이다. 바울의 모델은 부모와 장성한 자식으로서의 관계이다.
바울 개념의 핵심은 바울이 그의 교회들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그 핵심을 밝혀준다. 즉 그가 고린도인들에게 ‘우리가 너희의 믿음을 위해서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함께 돕는 자가 되려 함이라’(고후 1:24)고 말한 두 마디가 그것이다. 바울은 그의 공동체 위에 군림하는 지위에 자신을 놓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을 향하여서 권위적인 자세로 행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들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할 것을 거절한다. 그리스도 자신에게 복종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는 모든 일 가운데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교회에 속해 있지, 교회가 그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이유이다(고전 3:22, 23; 12:28).
제18장 사도로서의 권위
바울의 공동체 안에서 행사했던 권위는 강압이나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의 공동체들이 자신의 견해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권위에 대한 바울의 접근은 자유에 대한 그의 이해와 독립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고 그것과 밀접한 연관 가운데 되어진 것이다. 그가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공동체들이 벌써 자유 안에서 있음을 그는 강하게 확언한다(갈 5:1,13). 바울의 임무는 그들이 그 자유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고 또한 다른 이들이 그들에게 강압할지도 모를 자유에 대한 그릇된 설명을 분별하도록 돕는 것이다. 권위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또 다른 면에서 그의 자유관과 관계가 있다. 앞서 봤듯이 그에게 있어서 자유는 어떤 것으로부터의 독립을 수반하지만, 그리스도께 의지함을 통해서만 그것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경험이 시작되며 이 기초 위에서만 자유가 지속되고 깊어진다. 또한 자유의 삶이 상호 의존을 수반한다는 것도 이 살펴봤다. 특별히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간의 의존은 상호간의 섬김과 복종을 낳는다.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그들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도 자신까지도 복종해야 할 궁극적인 권위는 ‘유앙겔리온’(복음)이다. 이를 전하도록 바울은 부르심을 받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자신이 세운 공동체에게 그것을 전하였다.
권위에 대한 바울의 모든 접근방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모든 권위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고 성령 에 의하여 전달된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이스라엘의 예언사에서 그리고 사도시대의 교회 성장 시기에 이 권위는 결정적인 위치에 있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은 늘 권위있게 말씀하시며 권위있게 일하신다.
권위는 사람들을 지배함으로써가 아니라 말과 행위로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권위는 사도들을 통하여 전달되었는데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허락하신 사역을 통해서 서로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도구들이다. 따라서 사도바울의 공동체 이상은 어떤 문화적인 선례를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교훈과 본에 의한 것이다.
결 론
바울의 공동체들은 그가 그들에게 제시한 그의 공동체이상을 실현하는 데 실패했으며 바울 또한 이런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동체에 대한 그의 견해가 단지 난해하고 특별하기 때문에 실행불가능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이 이상은 바울 당시의 공동체에 대한 다른 견해들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이상향적으로 평가한 데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안에’ 있는 사람들의 잠재력을 조심스럽게 고려해서 나온 산물이다. 바울의 공동체관은 필연적으로 그의 복음에 관한 이해로부터 전개되며, 바로 이 복음이 인간존재의 실질적인 모순들과 맞물려 있다. 또한 그의 공동체 생활에는 아무런 구체화된 신앙고백이나 신조가 없었으며, 사람들이 모일 때 따라야만 하는 의식적인 순서도 없었고, 공동체의 사무를 관장하는 성직자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공동체들을 하나의 조직화된 단위로 만드는 교파적인 권위도 없었다.
바울의 공동체관은 또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사상과 행동방식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 이론을 형성하는 데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회관에 대한 바울의 이상은 배아적인(seminal)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바울이 현대에 영향을 미친 예로 막스 베버(Max Weber)가 ‘카리스마’의 개념을 도입한 경우를 들 수 있다. 권위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개념을 밝히는데 있어서 이 ‘카리스마’의 가치는 루돌프 솜(Rudolf Sohm)의 교회사와 법에 관한 저서에서 다루어졌는데 막스 베버는 여기서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솜 자신은 이 용어를 바울로부터 직접 취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화적인 상황의 변화로 바울 공동체관을 오늘날에 맞게 실제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경우도 있지만, 그 배후에 있는 원리들은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추구하는 이들의 관심을 계속 끌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공동체관은 가정교회나 여타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대안들을 만들어내도록 자극해 왔다. 그러나 이것들이 바울의 사역에 대한 동시대적인 의견을 항상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최근에는 좀더 대인관계를 중히 여기고 성직계급의 성격이 강하지 않은 전통적인 조직의 소그룹(cell group)이나 은사중심 모임들이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느낀점:
개인적으로 동의되는 것이 많지만 동의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봐야하는 것이고, 그 복음주의도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나면 안돼며, 또한 끊임없는 씨름이 없이는 얻어지지 않는 것이란 사실이다. 인간의 우매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깨달아 알아야 하며, 진리를 탐구하되 인간의 자아적 기준이 우선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분명하지 않은 선은 더욱 더 하나님께만 집중해서 바라봐야 한다. 철저한 인간 중심적 탐구와 관찰과 연구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할 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참 빛과 깨달음에서 노력하고 씨름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주의를 살찌워가는 방향이고 빛을 좇아가고 받는 자의 사명이다.
바울 사도의 생각을 철저히 이성적으로 바라봐야 겠지만, 그 바탕과 배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참 빛에 맞추어져야 한다. 바울은 예수님이 아니다. 또한 칼빈도 예수님이 아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은 오직 진리의 복음이며, 성경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일 뿐이다. 그 외에 것을 너무 폄하하지도 높이지도 말아야 한다.
바울의 공동체관도 그러한 맥락을 기초로 해서 봐야 하며, 글 쓴이의 의도와 그가 가진 학문적 배경과 사상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신학적 씨름과 연구 대상, 고민도 아울러서 지켜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는 자의 기본은 , 하나님의 참 빛을 은혜로 깨달아 안다는 것을 기초한 씨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이 은혜보다 앞서지 않게 하며, 생각이 진리보다 먼저되어서는 위험하다. 오직 주가 주시는 참 빛에 의존해야 하며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을 해내며 씨름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는 자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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