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씀 : 사무엘하 21장 8절 - 14절
제 목 : 하나님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입니다.
포인트 :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으로 인도해주시는 우리의 부모이십니다.
핵심단어 : 부모의 마음
8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9 그들을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기니 기브온 사람이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10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11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의 첩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
12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블레셋 사람들이 벧산 거리에 매단 것을
그들이 가만히 가져온 것이라
13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한 시를 같이 읽어보려고 합니다. 제목“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심순덕 님이 쓰신 것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는 유명한 시입니다.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어리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 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저 이불이 소리를 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깍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덕없는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 만 알았는데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아!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님들은 참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할머니 권사님들 정말 존경합니다. 물론 할아버지 되시는 우리 집사님들, 장로님들도 마찬가지로 존경합니다. 저는 겪어보지 못했던 보릿고개를 여러분들은 겪어보셨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셨고, 양동이 지고 물 길러 다니셨고, 버스 값 아끼려고 먼 길을 보따리 이고 걸어 다니셨던 분들이 여러분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식 잘 되라고 나는 굶어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챙겨주셨던 우리들 어머니들, 나는 찬 데서 자고 찬밥을 먹을 지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챙겨두었다 먹여주셨던 분들이 우리들의 어머니셨습니다. 자식들이 하나같이 잘 되기만 바라며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마음으로 인생을 사셨던 분들이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이십니다. 연로한 부모님이 바라는 것은 자식들 다 서로 우애가 깊고 서로 잘 되서 헌 데서 자는 놈 없고, 먹을 것 없어서 굶는 놈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자식을 향한 부모의 한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성경 속의 어머니를 같이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 왕의 첩이었던 리스바라는 여인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니 남편 사울의 죄를 리스바의 두 아들들과 다섯 손자들이 죽음으로 치룹니다. 죽임당하기 위해 끌려가는 자식들과 손자들을 보며 연로한 리스바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을 것입니다. “다 내 탓이요, 다 내 탓이요” 하면서 할머니 리스바는 땅바닥을 치면서 통곡했을 것입니다. “생때같은 내 자식들”, 분명 나이가 다들 많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아직까지 장성한 아들들이 품안에서 키울 때의 그 모습으로만 여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끌려가는 아들들의 모습과 아기 때 나를 보면서 웃던 얼굴이 겹쳐져서 어미는 가슴 쑤시는 아픔을 느낍니다. 이윽고 아들들과 손자들이 나무에 목매어 달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옷을 찢고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머리에 재를 뿌리면서 울부짖습니다. “주님, 어찌 이런 일들을 저에게 허락하십니까? 주님, 어찌 이런 험악한 일을 감당하라고 하십니까? 주여, 이 늙은이를 정녕 안타깝게 여기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주님, 저는 감당하기 힘듭니다. 주님, 정말 괴롭습니다. 주님, 우리 아들들은 잘못 없습니다. 모두 다 이 못난 어미와 아비 때문인데, 왜 그러십니까? 주님.”
어쩌면 리스바는 하나님께 원망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니 그 누구에게도 따지지도 욕하지도 않고, 묵묵히 혼자서 아들들과 손자들의 시체를 지킵니다. 원망하고 증오했다면 주변 사람들이 좋게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다윗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리스바는 그저 묵묵히 눈물로 감당한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섭리고 손길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움과 증오 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죄 값을 치르느라고 죽었다지만 죽은 뒤에도 수치를 당한다면 어미로서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 값을 치른 마당에 죽은 자녀들의 시체라도 온전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체를 들짐승들이 뜯어 먹으면 그것은 그 시체 된 사람의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리스바는 어미로서 끝까지 자녀들의 자존심만은 지켜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니 저의 이 마음도 아실 것입니다” 하며 지킨 것입니다. 노구의 몸을 이끌고 밤낮을 잠도 안자고 들짐승들이 오면 위험한 상황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식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지킨 것입니다. 굵은 베를 가져다가 바위 위에 펴고 며칠 동안인지 정확히 말씀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을 홀로 지켰던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 몸도 마음도 지쳐서 “그래 아들들아 어미가 이 정도까지는 했으니까 잘 가렴” 하며 내려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리스바는 긴 시간 가뭄 때문에 흉년이라 비가 오지 않는데 비가 올 때까지 지켰습니다. 몇날 며칠이 걸렸는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동안 한 결 같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지킨 것입니다. 이런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병원에 가보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특히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의 환자들을 보면 동일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병자로 누워있는 자식을 위해 몇 년을 부모는 옆에서 간호할 수 있지만, 1년 이상의 오랜 시간동안 간호하는 자녀들은 드물다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 곁에서 병수발을 끝까지 할 수 없지만, 부모는 자식을 위해 끝까지 헌신하고 나아가서는 자기 몸과 바꾸라면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식 살리는데 돈이 얼마나 들던지 상관없습니다”라는 대답을 부모는 서슴없이 합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형제들이 다 모여서 상의하겠다고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그 마음은 정말 위대합니다. 아무리 미운 짓만 골라했던 자식이라도 아파서 병자로 누워있으면 어미는 찾아가서 병간호를 합니다. 아무리 자식이 화를 내고 버르장머리 없이 행동해도 부모는 다 받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내 핏줄이고 내가 키웠고 내 사랑을 먹고 자란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내리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비슷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 그래서 부모의 자녀에 대한 내리사랑인 것입니다. 조건없는 사랑이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참 대단한 리스바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적어도 며칠 동안이나 지킬 수 있는지 말입니다. 리스바와 같은 동일한 조건이라면 나는 한 며칠은 그래도 버틸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여기서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리스바의 소식을 며느리들과 손자 며느리들, 그리고 다른 친척들은 안 들었을까요? 리스바가 목숨을 걸고 지키는 이 소식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날 며칠을 지켰기에 분명 이 소식은 다 퍼져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한 명이라도 와서 함께 지켰다면 성경은 기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리스바와 같은 마음으로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혹시 갔다가 다윗의 귀에 들어가 화를 당하면 어쩌나 했을 것이고, 들짐승들에게 해코지를 당하면 어쩌나 했을 것입니다. 시체가 된 나의 남편과 아버지와 형제보다 내 안위가 더 중했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나’ 라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마음인 리스바와 같은 마음을 갖지 않은 것입니다.
보리를 베기 시작한 때는 4월 중순쯤이었습니다. 가뭄으로 무더운 나날이었습니다. 밤에는 춥습니다. 회개함을 상징하는 굵은 베를 가져다가 바위 위에 펴고 그 위에서 쫓은 것은 분명 원망과 증오보다는 회개하는 마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밤에 자다가도 소리가 들리면 일어나서 훼이 훼이 하며 새들을 쫓고, 들짐승들이 모이면 모닷불을 피워서 지켰던 것입니다. 악취를 내며 썩어가는 아들들의 시체를 보면서 리스바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남편 사울에게 더 많은 조언을 했을 것을', '하나님께 더 매달려야 했는데' 하며 후회도 했을 것이고, “다 이 어미의 탓이다, 다 내 탓이다. 아들들아” 하면서 통곡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리스바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윗을 원망하지 않는 경지까지 갔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해 분노와 증오를 갖고 행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리스바가 다윗의 귀에 들리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임으로 이것은 리스바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었다는 것입니다. 리스바의 행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뭄을 풀어 주는 응답으로 이어지는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도 리스바의 행동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다시금 공평과 인자를 베푼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두루 빛을 주시고 때에 따른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더군다나 이제 죄 값을 다 치른 이들에게 더 이상 죄를 물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되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이들을 바라보시고 계심을 깨닫고 공손하게 예절을 갖추어 묘에 장사지내 준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을 보면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라면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을 분명히 이해했다는 표시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전히 이러한 행동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행한 후에야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행동은 곧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 즉 부모와 같은 마음을 알고, 인자와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분명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죄의 값을 반드시 치르게 하십니다. 그러나 인자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입니다. 악인이 끝까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악인이 돌아와서 회개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이 죄 값을 다 치렀다면 하나님의 인자하신 손길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자녀로서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바라보면 더욱 많이 깨달게 되는 것입니다.
아기 때는 말을 못하니까,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우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신앙도 아직 성숙하지 않았을 때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떼쓰고 웁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라서 부모의 마음을 아는 나이가 되면 내 생각을 내세우고 대들기 시작합니다. 반항합니다. “이게 아니지 않나요? 그건 어머니 생각이죠? 내 생각은 달라요? 왜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십니까?” 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고집부립니다. 신앙 나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정도 교회를 다니고 신앙이 생기면 그때부터 하나님을 내 생각에 맞추려 합니다. 설교도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고, 기도도 내가 하고 싶은 기도만 하려 합니다. 헌신도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하고, 하나님을 바라봐도 내 생각을 기준으로 바라보려 합니다. 남의 말은 잘 듣지도 않습니다. “네가 뭘 알아” 하면서 신앙 선배고 뭐고 말씀으로 깨닫게 해줘도 자기가 듣고자 하는 말씀이 아니면 흘려보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소년기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아직 반항기고 신앙적인 질풍노도의 시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감정적이고 직선적이며 고집을 부리며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비록 이러한 모습의 자녀일지라도 끝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려 주십니다.
리스바는 어찌되었든 간에 미워나 고우나 그래도 내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고 똥오줌 다 맡아가면서 키웠던 내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내 몸보다도 더 사랑하고 나 보다 먼저 생각했던 내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실수하고 어수룩해도 내 자식이기에 다 용서되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어리석음도 우리의 교만도 우리의 죄도 다 용서해주십니다. 끝까지 기다리시고 끝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을 들어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지만, 또한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를 감싸고 계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리스바의 모습에서 하나님은 이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로서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분명 공의의 모습으로 채찍을 드시지만, 사랑의 모습으로 감싸 안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다윗도 안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으로 자녀들을 인도해 주시는 우리의 부모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으시기 축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길만 의지하시고 공평과 사랑으로 인도해주심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리스바의 심령을 이해하시고 자녀들이 잘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흘려주시기를 또한 기도드립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것을 이해하시고 인도해주십니다.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모든 일에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잘 분별하시길 또한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모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많이 보여주시길 또한 축원드립니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신앙과 하나님의 마음을 흘려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가슴에 잘 새기시고 깨달은 말씀은 꼭 부여 잡으시길 축원합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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