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바울의 성령
담당교수 : 김학유 교수님
제 출 자 : 유성두 강도사
들 어 가 기
바울은 성령으로 인해 사역을 시작했고 인도받았으며 함께 하심으로 사명 감당할 수 있었다. 바울을 알려면 성령을 알아야 하며 바울이 성령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선교사 바울이 어떻게 성령을 이해했는지를 알아보면서, 그것을 오늘날 선교사의 성령 이해에 연결해 본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어떻게 바울과 함께 했는지 이 장에서 알아보려 한다.
1. 바울의 신학적 배경
1) 유대교
바울은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랍비가 되기 위한 학문에서도 강장 엄하다고 알려진 샴마이학파에 속해 있었고, 그 중에서도 배우는데 탁월하고 뛰어났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위대한 랍비로 알려진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엄격한 바리새 교육을 받았던 바울은, 모세의 율법과 유대의 전통에 극도로 열의가 높았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었던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외적인 행동이외에 그의 철저한 율법 교육적 영향은 그로 하여금 다메섹 사건 후 구약을 영감의 글로 인정하고, 그것을 인용하여 철저히 복음주의적인 신학과 교리를 완성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바울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윗의 혈통사상,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상 등 많은 성서적 논증들이 그가 유대교의 근본적인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바울은 70인역 성경의 유대인으로 불릴만큼 그의 서신을 통해 70인역을 많이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다메섹 경험
바울이 자신의 유대적 배경과 헬라적 배경에서 어떠한 것을 더 많이, 비중있게 물려 받았건 혹은 후에 초기 교회의 전승과 자신의 선교체험에서 무엇을 도출해 내었건 간에, 그의 모든 사상은 다메섹 도상에서 얻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한 통찰력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빛과 음성으로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체험은 바울로 하여금 기존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새롭게 조명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는 유대 랍비적 사상에 물들어 있던 바울의 사고를 휠씬 뛰어넘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통찰력이다. 이는 바울 자신의 증언대로 그는 죄와 율법과 초등학문에 대하여 그리고 자기자신과 육체와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할 만큼 완전히 새로워진 세계를 맛본 것이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구약적이고 유대적인 지식은 신약의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이 다메섹에서 겪은 체험은 바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3) 바울의 성령이해
바울의 영에 관한 교리의 배경은 궁극적으로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나님의 영을 인간과 구별하며 인간보다 높은 차원으로 서술하고 있다. 즉 영이란 예언과 같은 초자연적 은사를 수여할 수 있고 초자연적 체험을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구약성경에서의 이러한 영에 대한 이해는 유대교의 전통아래 있던 바울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바울의 성령론은 그의 삶의 배경이 되는 헬라 사상권에 속한 영지주의나 신비종교, 그리고 헬라적 유대주의의 영향아래에 있다. 비록 바울의 영의 개념이 학문적으로는 유대적 배경을 가지며, 실존적 위치로는 헬라적 문명아래 형성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다메섹에서 체험하게 된 예수의 영을 만난 후,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복음 전도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영의 개념을 이제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창조된 새 세계로서 세워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곧 예수의 생각과 같이 성령은 믿음을 통해서 또는 믿음 안에서 장차 있을 신의 지배에 대한 강력한 표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롬14:17, 고전4:20)
2. 바울 선교의 성령
신약의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선교도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방지역의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안수받았다.(행13:1-3) 아시아로 가고자 했던 바울의 발길을 유럽으로 바꾼 것도 성령의 지시였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신 이도 성령이셨다. 이처럼 바울의 복음선포와 성령의 능력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성령은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을 선포하는 힘이고 능력인 것이다. 알렌은 바울의 선교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갔을 뿐이라고 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방지역을 선교대상으로 삼아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실시하였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행13:2-4)”
이방인의 선교사로 사명을 받은 바울은 안디옥교회에서 대략 1여년간 일을 한다. 그리고 안디옥교회는 부흥과 성장이 일어났다. 그때 성령은 바나바와 바울을 구별하여 선택하시고 보내신다.
바울의 선교는 성령이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시는 선교라는 것이다. 바울의 선교는 그래서 성령이 주관하시는 선교라는 것이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6-7)”
성령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파하려는데 막으셨다. 마게도냐로 갈 것을 말씀하신다. 바울의 생각과 계획대로 이끄시는 것이 아닌, 성령의 계획가 생각대로 이끄시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인 것이다. 비두니아로 가려는 바울의 계획은 예수의 영이신 성령의 허락지 아니하심으로 무산된 것이다.
성령은 선교를 하는 선교사의 계획을 억제하시기도 하시며, 계획과는 다른 곳으로 거의 강제적으로 이끌어 가시기도 하신다. 바울의 경우처럼 말이다. 바울은 철저하게 성령께서 훈련시키는대로 그리고 이끄시는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울이 깨달은 선교는 성령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의 선교는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순종하는 선교였고, 성령께서 진행해 나가시도록 충성된 병사같이 행하는 선교였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바울은 사명을 주신 분이 누구이며 선택하시고 이끄시고 함께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다메섹에서 만나주신 예수님과 은혜로 함께해 주시는 성령님, 그리고 나를 선교 사명으로 택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선교의 주관자이시며 인도자이시고 주체이신 것이다.
바울은 로마시민으로 태어나 유대인의 교육과 헬라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율법과 헬라어에 능통하도록 교육받으며 자랐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그가 하나님의 계획아래 선교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바울의 다메섹에서의 회심 사건이후 바울은 성령 충만하여 곧바로 회당에 가 예수의 하나님 아들이심을 전파하게 된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9:17-20)”
즉 하나님 아버지가 선택해 주시고 예수님이 부르셨으며 성령님이 충만하심으로 힘을 주시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볼 때, 바울이 선교를 한 것이 아니라 선교의 주관자는 성령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관이시고 주체이시고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또한 성령은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의 영(롬8:9,14, 고전12:3)”으로도 불리워지고 “예수의 영(행16:7)” 또는 “그리스도의 영(롬8:9)” 으로도 불리워졌다. 바울은 성령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선교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령은 바울에게 권능도 허락하시고 능력이 나타나도록 행하여 주셨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행13:9-12)”
여기서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이러한 능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게 된다.
성령은 권능으로 선교 사역에 있어서 행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로는 선교의 진행과 열매들이 맺히게 됨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19:11-12)”
두란노서원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며 권면할 때 그 안에서 순종치 않고 비방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서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서원에서 매일 강론하기를 두 해 동안 한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사는 자들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행19:8-10)
이럴 때 하나님은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셨다.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도 낫고 악귀도 떠나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로 인하여 에베소에서는 두려움이 생기고 주 예수 이름을 높이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행19:11-18).
그러나 여기서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에서 능력이 나간 것도 아니고, 바울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도 아니다. 누가는 분명하게 적고 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행19:11)”
하나님이 행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을 사용하셔서 능력을 나타내 주신 것이다.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 삼위 하나님께서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며, 성령께서 인도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믿는 모든 자에게 임하여 주신다. 믿음은 들음으로 생기며 믿는 자는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 선교를 이끄시는 성령은 또한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하여 주신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행19:1-7)”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임하심으로 그들이 방언도 할 수 있고 예언도 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7-11)”
그리고 성령은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나타내준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성령은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인간의 지혜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보여주신다. 바울은 그가 가진 지식과 지혜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이끌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선교의 복음전함은 그래서 인간의 지식과 지혜보다 성령의 동행하심과 역사하심이 더 중요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래서 성령을 의지해야한다.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와 경험이 선교의 복음 전함에 영향을 주고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들은 주체가 아니며 주관자가 아니다. 오직 성령이 주체이시고 주관자이신 것이다.
선교사는 그래서 성령 충만하도록 힘써야 하며,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도록 사역에 있어서 누가 주인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현대 선교지역에서 수고하고 애쓰고 있는 많은 선교사들이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개인 상황과 역할, 그리고 선교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다면 그건 빨리 깨닫고 돌아서야 한다. 그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성령 충만이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현재 선교 상황은 만만치 않다. 각자의 파송 교회와 교단의 입장 때문에 계획에도 없는 사역을 해야 하고, 해야 할 일은 못하고 다른 것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물론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의 단편으로 이뤄어진 일이라면 더 바랄것이 없지만, 그것이 객관적으로 봐도 아니고 깊은 묵상하고 고민해도 아니라는 해답을 얻는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성령에 민감하지 못하고 충만하지 못하여 말씀의 뜻도 구별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뜻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른 체, 그저 시류에 따라 그때그때 진행하고 마무리 짖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안타까운 현실이 작금의 선교 현장에서 종종 목격되고 있음은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다.
한 선교지에 갔다가 언어도 종족도 문화도 다른 그 곳에 한글로 교회 예배당 입구 쓰여진 글을 보고는 가슴이 아픔을 느낀 경험이 있다. ‘1998. 공월, 공일, 어느 교회 누구 권사, 누구 장로 기증’ 그리고 그 예배당 정 가운데 벽에는 그 분들과 선교사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어찌 보면 참 아름답고 은혜로운 장면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1-2)”
우리는 하늘에 상급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서 높여짐은 미리 높임 받은 것이고 이 세상에서의 상급에 목말라한다면 하늘에서 준비된 상급은 말라질 것이다. 이름을 드러내는 데에 급하게 된다면, 정말 존귀히 여김 받아야 할 때는 오히려 창피함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민첩하게 반응하고 민감하게 깨달아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상황과 환경에 반응하고 순종하도록 자신을 이끌어야 한다. 그것이 쉽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도 순종함으로 가려 한다면, 날마다 죽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움직이는 선교사는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며, 부족한 인간이기에 실수하더라도 은혜 안에서 뛰놀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선교는 성령의 이끄심에 민감한 선교이며, 선교의 주관자는 성령이시다. 그리고 그 이끄심에 순종하는 선교가 바로 바울의 선교이다.
마무리 글
성경은 바울이 선교의 주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또한 바울이 의지없이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움직인 것만은 아니다. 성령은 적절한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바울을 이끌어 주셨고 바울은 그것에 반응한 것이다.
성령은 여러 가지 상황에 따른 모습과 사역을 보여주신다. 어느 때는 불로 바람으로 빛으로 숨으로, 또는 어느 상황에서는 능력으로 나타나시며 말없이 탄식으로 기도해주신다. 이외도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도우시고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알게 해주시며, 하나님의 깊은 뜻을 드러내 주신다. 성령은 기도하시며 인도해주시며 깨닫게 해주신다.
선교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장이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장이다. 그래서 맡은 사명을 감당하는 선교사들은 성령에 민감해야 하며, 순종함으로 민첩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들어 쓰신 것이다. 바울을 본 받아야 하지만 우리는 바울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바울처럼 순종함으로 민감함으로 민첩함으로 하나님을 따라야 함에는 변함이 없다. 각자의 사명과 모습은 달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깊이와 상황도 각자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교의 주인이시고 선교의 주관자이심에는 변함이 없다.
선교사는 이 점을 늘 명심해야 한다. 나를 드러내기보다 성령에 민감하길 바라고, 나의 필요를 채우기에 급급하기보다 말씀에 사로잡혀 민첩하게 행동해야 한다.
유혹과 고민이 밀려와도 고난과 핍박이 겹쳐와도 받은 사명 감당해야 하고, 감당하도록 채찍질해야 하는 선교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서도 말 없이 탄식으로 기도해주시는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커지며, 우리가 부족하고 실수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역전되는 경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바라보는 사람은 연약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결과를 낳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자신의 실수가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나는 기회인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것을 늘 명심하고 일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철저한 자기와의 싸움을 경유해 나가야 한다.
참 고 도 서
김세윤,「예수와 바울」(서울: 도서출판 참말, 1993)
김정주,「바울의 성령이해」(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박형용,「주해 사도행전」(서울: 성광문화사, 1990)
이종성,「성령론」(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전경연외 4인 공저,「신약성서 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3)
그레샴 메이천,「바울종교의 기원」(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98)
롤랑 알렌,「바울의 선교방법론」, 김남식 옮김(서울: 도서출판 베다니, 2007)
J. C. Beker,「사도 바울」(서울: 기독교문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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