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예수님이 허락하신 이유
2008. 9. 29
설 교 자 : 유성두 강도사
말씀 : 누가복은 22:31-34. 요한복음 21:15-17.
제목 : 예수님이 허락하신 이유.
오늘 말씀은 최후의 만찬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누가 배신했냐는 의문으로 서로 나누다가, 누가 큰 자냐란 다툼으로 번진 사건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제자들은 무지하고 협소하며 세상적인 가치판단으로 어두워져서 서로 잘났다고 떠들었을 때, 예수님은 그때 묵묵히 수건과 양동이를 가지고 오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닦아 주시는 것입니다. 섬김의 도가 무엇인지, 용서와 이해,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책망하고 야단쳐도 모자를 판인데, 오히려 가르쳐주시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지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31절“시몬아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 베드로,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명칭대신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은 본명인데 여기서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는, 이후에 반석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을 아시고 연민과 애틋한 마음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반석이 네 이름인데 반석처럼 단단하고 견고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거란 것입니다. 그저 연약하고 한없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만 보여줄 것이란 예증입니다. 옆에서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면서 자기 잘 났다고 떠드는 베드로를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한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바라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31절 하반절“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한다라?! 다시 쉽게 설명하면 키질 할 때 밀이 키 안에서 왔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사단이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고 치밀한 괴롭힘으로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제자들에게 일시적인 사단의 유혹과 어려움이 올 것이란 말씀입니다. 사단는 우는 사자처럼 먹이를 기다리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듯이 우리에게서 틈을 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틈이 보이면 비집고 들어옵니다. 정신없이 몰아치고 사정없이 힘들게 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구 괴로움을 줍니다. 그런 시간이 조금있으면 제자들에게 올 것이란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단이 하나님께 허락을 구한다는 것은 좀 유념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다시말해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욥을 시험할 때도 그랬고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을 이기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는 사단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전혀 이길 수 없습니다. 아니 앞에 서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자이신 우리 주님은 승리하셨고 결박하셨고 이기셨기에 그 이름으로 우리는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믿을 때 그 이름으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붙잡힌 바 된 믿는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됩니다. 그것이 힘이고 그것이 능력이며 그것이 진리입니다.
다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32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뭘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중보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중보하심으로 우리는 이길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고 평안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중보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조금 있다가 배신하고 다 도망가고 떠날텐데, 예수님은 다 인정하고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용서하심으로 미리 권면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애들아 이후에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다 도망갈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생각대로 선택하고 깊은 한숨과 허망함과 배신에 사로잡힐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때를 미리 알고 중보기도했단다. 너희들은 오직 믿음 져버리지 말고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길 바란다. 나의 제자들아”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인간은 서로 잘 났다고 떠들고 싸우며 서로 한 자리 차지하기에 바쁩니다. 예수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든지 상관없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상관없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명예와 세상적 기준이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들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만의 모습일까요?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이 제자들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깨끗하다고 할 수 있냐는 말씀입니다. 만약 ‘에이 그래도 난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가지는 않았습니다’라고 하신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두 계명을 매일 삶속에서 지키셨습니까? 온전히 다 지켰다고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예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린 그저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두 계명을 알지만 어느 누구도 철저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안타깝고 아프며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한데, 우리는 늘 죄 짖는 것에 빠르고 세상적인 것에 발걸음을 재촉하며, 범죄하는 자리에 가기를 좋아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우릴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제자들의 모습이나 우리 모습이나. 다 오십보 백보라는 것입니다. 오십보 도망간 놈이 어떻게 백보 도망간 놈에게 ‘야 넌 나보다 더 도망갔어. 이 나쁜놈아’라고 소리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똥 뭍은 개가 겨 뭍은 개보고 뭐라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며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제자들의 모습이나 우리 모습이나 다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다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도망가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잘못한 곳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회개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또 그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는 나쁜 놈입니다. 거룩한 체 하지만 속은 더럽고 추악합니다. 주님 절 이끌어 주십시오. 내가 의지하고 바라볼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하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32절 하반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회개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도 돌아보고 연약한 사람들을 서로 일으켜 세워주어야 합니다. 서로의 흙투성이 된 몸을 손가락질 하는 것이 아니라 감싸주고 닦아주는 것이 우리의 참 모습입니다. 더럽다고요 나도 더럽습니다. 냄새 난다고요 내 냄새는 더 고약합니다. 추잡하다고요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다 추잡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를 안아주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감싸줄 때, 예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건 당연한 것인데도 못하기에 우리의 작은 섬김에도 주님은 기뻐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를 너무도 배려해주시는 주님의 은혜,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이관대 이토록 사랑해주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을 뿐입니다. 그저 고맙고 그저 감사할 따름인 것입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말씀처럼 우리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기도해주며 감싸주는 것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지금 이시대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33절 말씀 보겠습니다.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지금 베드로는 내 생각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보다 맞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만든 창조주에게 자기가 맞다고 대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도 안돼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 베드로 하고 있는 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예수님이 배신할꺼라고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아 예, 정말 그렇습니까? 제가 배신합니까?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 아닐까요?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자기 말이 맞다고 떠들고 있으니, 그것도 예수님이 어떤 상황인지 어떤 기분이고 어떤 마음일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이 상황을 여러분 그려지십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담담하고 고요한 마음을 한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잘 났다고 떠들고 있는 목청 높여 자기 잘 났다고 말하는 베드로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 베드로의 모습,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우린 베드로처럼 내 생각, 내 마음, 내 감정을 내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휘자가 되고 판단자가 되고 리더인 것입니다. 우리 삶을 하나님께 드렸다며 고백하면서도 솔직히 우린 우리 마음대로 행동하는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난 아닌데요.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정말 존경합니다. 전 그러지 못하게 때문입니다. 전 제 삶의 일 순위가 하나님보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우선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주어진 환경에 의해 해야 하는 일을 합니다. 그것들이 다 하나님 안에서 있는 일이라는 핑계를 대고 말입니다. 그다음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는 늘 네 번째인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저처럼 이렇게 하지 마시길 기도드립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베드로는 옥에도 가고 죽는 데도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예 물론 나중엔 그렇게 되었지만 조금 있다가 일어날 일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나 자신을 과신하면 안됩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하며 죄속성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면 안됩니다. 그럴때 사고 치고 죄짖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기다리고 기대하며 걸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자신하지 말고 조용히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34절,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배신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앞에 베드로의 앞뒤 개념없는 말과 버릇없는 말투에 예수님은 호통치시거나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그저 묵묵히 바라보시면서 준비하는 차원에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깨닫고 기억날 때, 더 넘어지고 더 깊이 자괴감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예수님은 그물을 쳐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한 없는 인자하심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게 베드로를 안타까워하시고 배려하신다면, 왜 베드로가 부인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하는 것입니다. 막을 수도 있고 그렇게 부인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수도 있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사단을 허락하신 이유가 뭘까냐는 것입니다. 열심있는 이 제자 베드로가 평생을 안고 갈, 무거운 기억을 만들지 않도록 이끌어 주실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대답은 이후의 말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 보면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이 나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대답만을 가지고 살펴보면, 베드로 부인사건에 대한 해답이 나옵니다. 먼저 15,16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동일한 대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 이런 저런 설명 붙이지 않고 핵심만 말씀드린다면 이렇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이 문장, 이 문장이 이 전체 구절의 주절입니다. 즉 중요구절이고 나머지는 붙어온 구절이라는 뜻입니다. 즉 주님이 아시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이 아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리면, 내 생각과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판단이 더 중요하다라는 사실입니다. 이제야 베드로는 깨달은 것입니다. 내 판단과 생각, 그리고 가치관과 감정은 변할 수 있고 흐려질 수 있지만 오직 주님의 말씀과 생각은 절대 변함이 없으며 오직 완전하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베드로는 나는 죽고 예수님은 사는 그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17절의 베드로의 대답을 보면 더욱 확실해 집니다.“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이 말씀은 “주님,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배신할 거란 것도, 내 죄도, 내 부족함도, 내 무지함도 주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죄송하고 미안하고 창피합니다.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 주님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잘 났다고 떠들었지만, 그거 다 거짓이었습니다. 내 모든 것은 내 것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정말 주님의 것입니다. 난 죽고 오직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실 뿐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고 제가 이런 고백을 매일 삶속에서 드리길 기도합니다.
예, 맞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렇게 되길 바라시고 모든 것을 참고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만 살도록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된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린 우리 안에 우리가 너무 많으면 예수님이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우리를 치우고 예수님을 모셔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우선되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선되도록 우리를 채찍질하고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깨달을 때, 우리는 회개하고 애통하는 심정에서 끝나면 안됩니다. 주님께로 나와야 하며, 주님과 동행하도록 노력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허락하신 이 사건은 바로 누구를 중심에 모시느냐하는 문제 때문입니다. 우린 우리 안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를 빼내고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베푸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 선물로 인해 베드로는 나중에 정말로 옥에도 가고 매맞기도 하고 죽음의 자리까지 가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 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일반입니다. 여전하며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변개함이 없으신 분이시며, 후회가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하루 하루 삶속에서 주를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죽이고 주님의 생각을 모셔두는 것이야 말로, 천국을 소유한 백성이 걸어야 할 진리의 길을 잘 걷는 방법입니다. 저와 여러분 이 길을 내 방식대로 내 생각대로가 아닌, 주님의 방식대로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걸어가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