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

바울의 청중이해

잔잔한 파도... 2008. 7. 22. 00:46

        바울의 청중 이해

 

 

 

 

                     합동신학대학원

Th.M 설교학

                            강 도 사   유  성  두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청중들에게 종교적으로 다가갔다. 바울은 청중의 종교적 배경을 이해하고 효과적인 메시지 선포를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중점을 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그 지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과 교육수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파악하고 설교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바울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이, 예수님과 바울 모두 청중이 본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했으며, 거기에 적합한 설교 형태를 취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비유와 예화를 들어 교육 수준이 낮은 갈릴리 지방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바울은 교육의 혜택을 받고 철학적 지식을 가진 이방인들에게 논리적이며, 권위를 가지고 추상적인 이론을 어느 정도의 수사법을 적절히 사용하여 전달하였다.

바울과 예수님이 취한 형태는 다르지만, 메시지를 이해시키고 청중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단어 사용으로 쉬운 이해를 갖게 해주었다는 것에는 동일하다.

어쨌거나 바울은 청중친화적인 접근을 했으며,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청중을 또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신서를 쓸 때도 이것을 바탕으로 바울은 청중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 청중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 인식했다.

 

바울은 먼저 청중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그들 중에서는 하나님이 선택하여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것을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사도행전 13:47,48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 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 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그러므로 바울도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 갈 때면, 그들 안에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2) 청중을 파악하고 서두를 꺼냈다.

 

사도행전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그리고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해 아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면, 그 사람들에 맞는 양식으로 다가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설교 서두의 주위를 환기시키고 집중시키는 단어나 문장의 배치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한 내용을 보면,

행13:16“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설교하기 전 제스추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청중들의 주위를 집중시키고 설교내용을 좀더 강조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행위이다. 여기서의 청중은 유대인들이다. 하나님을 알지만 복음은 모르는 같은 언어와 문화를 가진 유대인들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같은 동족들 유대인이 집중하고 강조하기 위한 어색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제스추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표현해도 이해되고 오히려 집중되는 제스추어를 사용한 것이다.

루스드라에서 한 설교의 시작은 다른 것들과는 또 다르다. 이유는 앉은뱅이를 치유하면서 오해를 사게 되었고,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겨 제사하려고 했던 사건 때문이다. 이때 청중은 이방인이고 신에 대해 자기들만의 이해로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사람인 바울과 바나바를 치유한 것만 보고 신으로 모실려고 한 사람들이었다. 어쨌거나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를 당혹스럽게 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제스추어를 한다. 옷을 찢고 소리지르는 것이었다.

행 14: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가서 소리질러”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하려 했던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이 행동에 놀랐을 것이고, 순간 주위가 조용해지면서 바울과 바나바를 주시했을 것이다. 온 시선이 이 둘에게 모여질때, 바울은 설교하기 시작했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의 설교는 이러한 바울의 태도를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분명한 것은 바울은 행 17:16“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에서 보여주듯, 우상이 많은 것에 대해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레오바고에서의 설교 서두를 그 분노했던 종교성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분노하고 따지듯이 다가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여 접근했다. 즉 아테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 우상 숭배를 매개체로, 접근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분노하고 통탄할 것은 해야 하지만 이들에게 이해시키고 효과적인 접근을 하려면

이러한 관심유도가 더욱 좋다고 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때에 적절한 상황화라고 본다.

바울이 택한 방법이나 접근법들은 그 시대와 지방, 청중들에게 맞는 알맞은 상황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밀레도에서의 설교는 바울이 설교한 것들 중, 감정적인 부분이 가장 많은 설교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에베소 사람들과 장로들에게 당부와 부탁의 설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서두의 접근을 보이는데,

행 20:18“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란 말은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정적 효과를 주는 말이다. 즉 함께 고생하고 애쓰고 눈물 흘렸던 동료들에게 바울의 이 말은 같은 동질감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파급효과를 갖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했건 생각하지 않고 말했건 간에, 바울이 서두에 꺼낸 이 말은 엄청난 감정 교류를 만들게 하였다. 그렇기에 뒤로 이어지는 모든 말들이 청중들에게는 하나 하나가 가슴에 쌓이고 녹아졌던 것이다.

또한, 유대인의 생각과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는 또 다르다. 주로 간증과 변론으로 시작되며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신분의 위치를 적절히 인식하여 접근했다. 사도행전 22:1-21까지의 설교 내용은 예루살렘에 왔다가 성전에서 붙잡혀 층대에서 설교할 때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사도행전 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여기서 ‘부형들아’란 표현은 친근한 표현이다. 즉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와 생활을 가진 유대인을 통칭하여 쓰는 말이다. 즉 스데반이 먼저 쓴 표현이지만, 이 단어는 같은 동질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쓰는 단어이므로 이 말을 들을 사람들은 종용히 들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이러한 모습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의 설교에서 잘 드러내주고 있다.

행 26:2,3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 히 여기옵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바울은 여기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청중의 이해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시작한다. 즉 겸허하고 온화하며 탁월한 감정적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서두는 유대인이며 젊은 왕 아그립바의 감정과 이성을 움직일 만한 단어의 적절한 사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즉 바울은 청중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 깊이만큼 시작과 서두도 그에 따른 적절한 제스추어나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송사들로 바쁜 아그립바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한편, 베스도에게는 못했던 것까지 말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나타내며, 여기에 유대인이라는 연결고리를 이어서 펼쳐놓는 것은, 정확한 상황 인식과 청중 이해에서 온 은사라고까지 여겨진다. 어투는 겸손하고 부드러웠기에 한 층 더 의도가 분명히 전달되었다.

 

 

 3) 청중이 이해하기 쉬운 단어와 언어를 사용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밀레도에서의 설교가 대표적이다. 동작언어인 ‘행한’,‘청하니’,‘보라’,‘다시 보지 못함’,‘왕래’등과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겸손’,‘눈물’,‘참고’,‘기다린다’,‘증거’,‘부탁’,‘가억’을 미루어 볼 때, 간곡한 부탁의 표정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돌봄과 회복의 메시지와 기도와 사랑의 메시지의 적절한 혼합이 듣는 청중으로 하여금, 깊은 감정의 이입과 유대감의 형성을 만들어 주었다.

여기에 믿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고 고민하고 있는, ‘회개’,‘믿음’,‘결박과 환난’,‘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하나님 나라’,‘하나님의 뜻’,‘은혜의 말씀’등은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해 준 것이다.

바울은 청중의 이해의 관점에서 본다면, 시의적절한 문장과 단어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설교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아테네 사람들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것에 관심있는지를 바울은 파악한 것 같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7:21절에 누가가 아테네 사람들의 특징을 기술한 것을 보면, 누가 혼자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즉 아테네 사람들이 새로 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 달리 시간을 쓰지 않았다고 파악한 것을 바울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7:22-31까지의 말씀 중에서, ‘종교성’,‘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천지의 주재’,‘한 혈통’,‘신의 소생’는 단어들에서 그 선택과 연결이 너무도 적절하고 상황 인식이 매끄러움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 설교한 내용에서도 청중의 파악과 그에 따른 단어 조합은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다. 사도행전 26:2-23까지 ‘유대인’이란 단어는 5번 나오며, 유대인의 다른 말로는 ‘내 민족’,‘열두지파’,‘유대 온 땅’,‘이스라엘’등이 있다. 그리고 아그립바와 베니게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의 선택은 더 많다. ‘유대인의 모든 풍습’,‘바리새인의 생활’,‘하나님의 약속’,‘대제사장’,‘회당’등 그 외에도 많다.

사도행전 22:1-21절 까지의 내용은 간증설교에 가까운데, 바울의 본인의 태생부터 시작해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일까지를 차근차근 파노라마처럼 펼쳐주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흥분된 유대인들에게 조용하고 절제된 언어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만 이해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단어들을 조합했고 거기에 절제된 감정처리로 간증형식의 설교를 한 것이다. 물론 끝마치지도 못했는데 중간에 끊어지고 유대인들은 더 흥분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바울이 예상하거나 원하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쩌면 유대인들이 흥분하고 광폭해질 것을 내다보고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유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관점과 태도, 단어와 어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즉 수사법을 화려하게 사용한 것도 아니고, 감정에 호소한 것도 아닌, 담담하고 분명한 어조로 충격을 가해질 것을 알면서도 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한 순종이다. 바울이 아나니아을 만날 때 환상으로 본, 자기가 감당해야 할 고난과 핍박을 보았다고 한다. 행 9: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이 말씀을 근거로 바울은 그저 충성하고 헌신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원하면서 이 설교를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청중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 까지 생각한 것이다.

 

 

4) 청중의 종교적 상태를 파악하고 설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방인 지역에서의 설교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루스드라에서, 그리고 아테네에서의 설교를 바탕으로 접근해보았다.

먼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를 보면, 장소는 유대인 회당이고 청중은 유대인들이다. 즉 지역만 이방지역일 뿐 청중들은 디아스포라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을 알고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를 소문으로 또는 직접, 간접적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즉 종교적으로 동질감을 형성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복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행 13:16)고 외치면서 동질감을 표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다른 설명보다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나님의 경륜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다 구약을 인용한 기독론을 논증한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베드로와 스데반의 설교와 비슷하게 전개되어 있지만, 바울은 죄사함과 이신칭의 교리를 더 추가해서 복음의 핵심을 보여주었다. 이신칭의는 바울 신학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는 바울이 유대인이 가진 종교성과 철학을 알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가진 구약은 기독론의 배경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방인들 보다 유대인들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지식적으로 유리한 입장이다. 즉 바울은 이러한 모든 것을 포함해서 설교를 한 것이다.

루스드라의 설교는 바울이 그 지역의 종교적 상황을 잘 파악했음을 알 수 있는 예다. 왜냐하면 비시디아 안디옥처럼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처럼 철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인식과 지식이 약한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바울은 자연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기고 제사하려고 했던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바울은 하나님의 참신이심을 선포하고 하늘, 비, 결실기, 선한 일, 음식 등의 친숙한 단어 사용을 했다.

행 14: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 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이것은 바울이 루스드라 사람들의 종교성을 파악하고 설교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리고 어려운 단어나 철학적 깊이가 있는 단어의 사용은 피했음을 엿볼 수 있다.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의 설교는 그들이 가진 종교성과 철학성을 면밀히 살피지 않고는 알 수가 없었던 설교였다. 그런데 바울이 설교한 내용을 살펴보면, 바울이 아테네 지역의 종교를 연구하고 접촉점을 찾을려고 애썼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가진 철학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다종교성을 알고 서두를 꺼내면서 시작했고, 그 내용을 보면 단어와 어법이 수사학적으로도 깊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당시는 찬란한 영광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여전히 식지 않은 지식에 대한 갈망과 학문, 예술에 대한 관심은 사그러지지 않고 있었던 때였던 것이다. 여기에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사조는 그 당시를 대표하는 철학 사조였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 시인인 아라투스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행 17:28). 이 의도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쾌락주의인 에피쿠로스 학파보다는 다분히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스토아 학파를 통해 청중들과 호흡하고 접촉점을 연결해 가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테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역사적 의식은 자신들이 아티카 본토의 흙에서 생겨났으며 이것을 특권으로 여기는 것이다. 바울은 이점을 걸고 넘어갔다. 즉 바울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주장하시는 주권자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이러한 아테네 사람들의 역사적 인식과 신관을 알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어느 지역이든지 우선적으로 그 지역의 종교성과 역사, 그리고 철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설교할 때는 듣는 청중의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적절하게 단어와 어법을 사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