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30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
담당교수 : 문상철 교수님
발 표 자 : 유성두 강도사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5월 21일 영국 요크셔 지방 반슬리의 경건한 감리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부모는 주님께 그를 서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의 가정적 분위기와 어머니, 여동생의 기도로 준비되어 17세에 회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테일러는 목표를 중국선교에 두고 준비하게 되었다.
18세부터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으며, 수련의가 되어 많은 훈련과 자기 부인의 신앙적 태도를 터득해 나가게 되었다. 가난과 영양실조에도 버티고 악성 열병에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테일러가 가진 믿음의 열정 때문이었다.
수련의 기간 동안도 늘 기도하고 전도하며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 것에 전념하였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분이 원하는 것만을 하려고 했던 오직 믿음으로만 사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국으로 가기 전 누이동생의 소개로 만난 본 양에게 테일러는 마음을 빼앗기고 열정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선교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래서 두 번이나 결혼을 하려다 결국 하지 못하게 되었다.
1853년 9월, 21세의 나이로 테일러는 중국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그리고 항구에 마중 나와서 기도하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테일러는 중국으로 향한다. 1854년 이른 봄, 상해에 도착한 그는 중국 복음화 선교회 소속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가 상해에 도착할 때는 태평천국의 난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의 일기를 봐도 구경하다 총탄이 날아오거나 대포알이 근처에 떨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신앙인으로서의 담대함과 무모함을 같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였다.
어쨌든 그 당시의 상황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서야 전도여행을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어려웠던 시기다. 그리고 상해는 또 다른 전쟁에 휘말려 있었는데, 홍건적들이 외국인 거류지 가까이에 있는 상해를 점령하고 있었고 정부군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도 10회 이상이나 전도여행을 용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감행해야만 했다.
테일러 이 당시 위대한 부흥사 윌리암 번스를 만나게 된다. 번스는 박학다식한 사람으로서 정다우며 타고난 지혜가 넘치는 훌륭한 인격을 소유하였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에게 영적인 아버지로서 많은 영향력을 주며 7개월간 동역을 하였다. 이 당시 일기를 보면 가는 곳마다 날씨와 환경,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 여기에 강도의 위협을 늘 경험하며 다녔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때마다 기도하는 습관을 먼저 가졌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며 또한 경험하게 되었다. 전도의 열심과 하나님을 향한 열정 때문에 배고픔과 더운 날씨와 길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속에서도 기도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번스라는 의지할 수 있고 본 받을 수 있는 동역자가 곁에 있었기에 또한 가능했다.
여기서 젊고 순수했던 테일러의 눈에 비친 그 당시 선교사들은 다는 아니더라도 많은 선교사들이 낭비가 심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따로 한적한 곳에서 중국인들과 어울리길 원했고 거기에 변발과 중국옷을 입고 생활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동료 선교사들이 이러한 젊은 테일러의 모습과 행동에 불쾌감을 표시했고 젊은이의 객기 정도로 보았다. 하지만 윌리암 번즈는 같이 사역하면서 테일러의 모습이 맞다고 여기고 변발과 중국옷을 입었다. 이런 윌리암 번즈의 모습은 어린 사람에게도 배울 점이 보인다면 배우는 정말 겸손한 태도였다.
문제는 중국인의 편견과 오해, 그리고 전쟁과 강도의 위험이 전부가 아니었다. 후원이 부족하고 일정치 않음으로 인해 중국 복음화 선교회에 어려운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1857년 정식으로 탈퇴하게 된다. 하지만 이 당시 어려운 제정은 오히려 테일러를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이끈 경우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을 하게되어 나중의 테일러 사역과 선교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스스로 경제적 자립을 하는 교회의 원리는 테일러 스스로가 중국사역을 준비하면서 경험하고 또한 중국선교 초기에 겪은 여려 경험들이 밑바탕 된 것이다. 시기적절한 하나님의 때에 딱 알맞은 돈을 준비해 놓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료 선교사 파커가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으로 자녀 때문에 스코틀랜드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테일러에게 병원을 맡기게 되었고 이 의료 사역 때문에 테일러는 더욱더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막막하고 무지했지만 후에 영국에 오려고 사역을 접고 후임자에게 넘겨줄 때는, 처음의 몇 배의 제정과 물질을 남겨주게 되었다.
또한 이 당시 그는 영파에 정착, 그곳에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되었다. 마리아 다이어 양을 만나게 되는데 테일러는 이때 외로움과 결혼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본 양을 잊지 못하고 있었지만 결국 포기했고 다시 엘리자베스 시슨즈라는 젊은 여자를 만났지만 테일러에 대한 잘못된 편견으로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만난 여자가 마리아 다이어였던 것이다. 마리아 다이어는 중국 선교를 꿈꾼 부모님 밑에서 자란 미션키드였다. 그리고 테일러를 만날 때는 미스 메리 앤 앨더시 여자 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중이었다. 둘의 만남은 처음부터 불꽃 튀기는 만남은 아니었다. 점점 달궈지는 진행형 만남이었고 오히려 중간에서의 어려움과 고난 때문에 더욱 깊어진 사랑이었다. 테일러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깊었고 그에 따라 둘의 교제 또한 반대가 깊었다. 오히려 독려해주고 이끌어줘야 할 리더들이 편견과 적절치 못한 행동 때문에 둘을 힘들게 했던 것이다. 특히 중국 최초 여성 선교사였던 앨더시 양의 반대와 그가 행한 처신은 이해하기 힘든 것들 이었다. 정식 선교사도 아니고 선교회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무례하고 중국옷을 입었으며 키도 작다는 이유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어쨌든 둘은 우여곡절 끝에 포기하지 않았던 테일러의 열정과 조용히 기다렸던 마리아의 인내심으로 결국 1958년 1.20(27세)나이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중간에 마리아의 삼촌이며 후견인인 윌리암 탄의 허락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는지 모를 이야기였다.
마리아는 테일러의 모난 성격을 부드럽게 해주고 그의 열정과 비전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준 최고의 조력자였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맡게 된 지방병원 사역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테일러는 의학 공부의 필요성과 건강의 이유로 인해 1860년 장기 휴가를 얻고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도 중국인 조수를 데리고 가서 닝포 신약전서의 개역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휴가 기간 중 선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중국내지 선교회는 이때 탄생된 것이다.
이 중국내지 선교회는 테일러의 경험과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조직이었다.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으며 노동자 계급 출신들이 주로 사역했고 제정에 있어서는 칼 같이 분명하고 정확하게 했다. 그리고 타 단체와의 경쟁은 피하고 선교본부는 중국 본토에 두기로 하였다. 더 현장 중심이 되고 필요를 빨리 알아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며 테일러의 경험상 멀리 떨어져서 행정을 보고 필요를 충당할 순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테일러는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강력한 지도자가 되었고 절대적인 독재자가 되었다.
그래서 제정에 있어서는 언제나 스스로 해결하는 방책을 따랐다. 어느 누구의 도움에 기대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리게 하는 방법이었다. 헌금을 호소하고 인간적인 도움을 요구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1865년 중국 내지 선교회는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1866. 5. 26. 최초의 중국 내륙선교사 일행을 인도하고 라메르무어호로 16명의 선교사와 4명의 어린이들이 4개월간의 긴 항해를 하였다. 배안에서 테일러는 오전에 부인은 오후를 맡아서 중국어를 가르쳤고, 학생들이 배멀리로 쓰러질 때는 간호원 역할까지 해야했다.
이때 선원들은 선교사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관할한 결과 자진해서 예배를 보아달라고 요청하였고, 하나님의 사업은 배 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중국 해안에 닿을 때까지는 한시도 예외 없이 태풍이 불어 망망대해의 추풍낙엽처럼 파선직전에 있곤 했었다. 식수가 떨어지고, 불이 꺼져서 밥을 지을 수 없게 되었으나 그 시련 속에서도 기도의 응답으로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거처할 곳을 마련, 집안에서부터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해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교인 수가 50-60명이나 되었다. 병원사역은 하루에 환자들이 200명씩이나 몰려들었고, 그는 테이블 위에 서서 뜰에 잔뜩 모여든 환자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제정과 필요한 물품은 아슬아슬 할 때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고 그 외 숱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테일러는 기도로 견디고 이겨냈다.
점점 시간이 흐를 수록 계속해서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았고, 신도가 1,500명이 넘는 교회가 되었다. 그 해에 아이들 중에 제일 귀엽던 맏딸을 잃게 되었는데, 이런 커다란 이별의 슬픔 속에서도 테일러 부부는 중국 내륙에 복음전파하는 사업에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되는 계기가 되었다.
즉 동역자 루이스 니콜을 위주로 한 다른 선교사 2명이 불평불만을 하기 시작했었고 그 이유는 적은 제정 지급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변발과 중국옷은 더욱더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나중에는 따로 식사와 기도회를 하게 되었고 측근이었던 제니 폴딩과 에밀리 블래칠리까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맏딸 그레이시 테일러가 8살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다른 동역자들에게서 동정을 얻게 되었고 다시금 단합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니콜 부부와 몇몇 동역자는 탈퇴하게 되었다.
아무튼 16개월이라는 긴 세월동안 항주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던 테일러 부부는 세례교인만도 50명이 넘었고, 열심히 나오는 수도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그곳은 더 이상 테일러 부부가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다른 동역자에게 맡기고 하나님 말씀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곳을 향하여 떠나게 된다.
그리고 테일러 부부는 2개월간의 보트생활을 청산하고 그곳 총독의 호의로 양주시 변두리에 일류급 중국인 호텔에 방 하나를 구하여 이사를 했다. 하지만 환자들과 방문객이 끊일 줄을 모르고 줄지어 찾아왔고, 테일러 부인의 유창한 중국어 실력과 그녀의 겸손한 태도에 많은 여자들이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회심하는 사례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양조우에서 지식인 계급들이 회의를 개최하고는 모든 범죄와 악행이 ‘예수교’를 전파하는 외국인들의 소행이라고 허위선전하면서, 24명의 어린아이들이 비인간적인 외국인들의 손에 의해 생명을 잃었다고 거짓말을 꾸며내었다. 그리고는 “용기를 냅시다, 그리고 우리의 원수를 갚읍시다. 공격하라/죽여라/모두 약탈하라”고 소리치며 폭도들이 집에 불을 지르고, 고함치며 파괴하였다. 하지만 테일러 일행은 폭도들이 파괴하고 불을 지른 집을 다시 수리하고 다시 시작했다. 아무 보복이나 행동을 하지 않고 묵묵히 사역을 계속 하였다.
이후 선교사들은 여느 때와 같이 평온가운데 생활하게 되었고, 허드슨 테일러는 네 번째 아들이 태어나서 모두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하지만 영국 행정부와 매스컴은 그냥 두지 않았다. 양조우사건을 오해하여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선교사들이 대포와 총검’을 내세워 중국인들에게 자기네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신봉하라고 강요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중국인들이 들고 일어나자 선교사들이 영국 함대의 보호를 요청함으로써 중국과 영국이 전쟁일보 직전에 와 있다는 것이다.
테일러 일행은 이러한 비난의 대상이 될 만한 어떠한 일도 한 적이 없는데, 아무튼 오해의 발단은 영국 영사관에서 본국에 보낸 보고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로인해 매스컴의 혹평과 더불어 몇몇 후원자들의 지원까지 줄어들어 선교부의 재정은 심각할 정도로 위기에 봉착했다.
그때 기도와 믿음 하나로 약 2,000명의 고아들을 돌봐주고 있는 영국 브리스톤에 있는 조지 뮬러는 양주사건이 영국에 정식으로 전달되기 훨씬 전에 중국 내륙선교회에 재정적 지원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먹었다. 그 후 2-3년 동안 매년 거의 10,000불식 송금해 주었고, 조지 뮬러는 재정적인 지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 개개인에게 위로와 격려의 글을 써보내주는 일도 있었다.
어쨌든 양주사건 이래 여러 가지 외적인 시련은 그가 겪은 내적 시련에 비해 가벼운 것들이었다. 내적 갈등과 실망의 수렁은 매우 깊은 골이 일어났고 끝없는 나락으로 이어졌다.
그 당시 글을 보면 “나는 나 자신을 증오한다. 나의 죄성을 증오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그것들과 싸워 이겨내지 못했다”
이런 내적 상황에서 테일러는 점점 신앙의 성숙도는 본인 스스로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깊어가기 시작했다.
이 당시 중국에는 테일러의 자녀들을 교육시킬 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친구이며 비서인 에밀리 블래칠리양은 테일러의 세 아들과 어린 딸 하나를 영국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교육시키는 일에 동의했다. 그런데 겨우 5살 밖에 안 된 유난히 귀엽던 막내 아들 새미가 양주로부터 운하를 타고 내려가는 배 속에서 몹시 앓다가 그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슬픔을 이겨내어 아이들을 보내겠다는 결심을 하고 떠나보냈다.
1870.6.21에 천진대학살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중국인들은 중국인 마법사들(중국인 그리스도인)이 자기들에게 마법(전도)를 걸었다고, 또는 이러한 흉악한 마법사들은 결국 외국인 선교사들의 앞잡이라고 분노를 토했다. 이렇게 분개한 중국인들은 천진에서 들고 일어나서 카톨릭 수녀들과 신부들, 심지어는 프랑스 영사까지 학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외국인 어른들과 아이들은 해안으로 대피하고 이곳저곳 막아달라고 탄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상황은 분노로 휩싸여서 외국인을 위한 거처를 더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테일러 부부는 선교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주일날 주간에도 두 세 번씩 성경공부를 하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중국인들에게 글을 읽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그 당시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테일러의 기쁨은 더욱 깊어갔다. 하지만 6주 후 진강에 있는 선교부집에는 아들 하나가 새로 태어나 테일러 부부에게 기쁨을 안겨다 주었는데, 콜레라가 발병하여 엄마인 테일러 부인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그 결과 영양 부족으로 아이는 1주일 만에 죽고, 그 후 얼마 안 있어 33세의 나이에 테일러 부인도 부르심을 받았다.
아내의 죽음은 테일러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아내를 슬픔과 고통없이 데려가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871년 말경, 테일러는 선교부의 집행위원 겸 중국 내륙선교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일을 수행해 갈 때 주님의 의사를 구하지 않고 성급하게 서둘지 않았다. 그리고 선교부 출입문 위에는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신다”라는 문구를 써 붙였다. 선교부의 지도자인 테일러가 버거의 퇴임으로 업무 인수차 영국에 와서 15개월간 머무른 후, 다시 중국을 찾았을 때에는 질병과 기타 장애물들로 인하여 몇몇 선교본부의 사역이 침체상태에 있었다. 교회들은 과거와는 달리 힘이 없었다.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성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대신 현존하는 사역을 보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바로 이때 항주에서 여성 사역을 맡아 책임지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27살의 여성 지도자 제니 폴딩양을 그의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그녀는 그 후 33년 동안 테일러 곁에서 헌신적인 봉사를 하였고 그로 인해 전선교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주 떨어져 있어야 했다. 중국내지선교회가 발전해서 테일러는 대부분의 시간을 중국 전역을 돌며 선교기지 사역을 감독해야 했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가장 어려운 부분을 맡으면서, 성령님의 힘을 의지하고 기도와 인내로 어려움들을 이기고 초신자들과 선교사들에게 새로운 열심을 불어넣었다.
그는 양자강에서 부인과 합세하여 남경에서 머물면서 많은 시간을 전도하며 보냈고, 매일 밤 그들은 그림과 슬라이드로 많은 사람을 모았다. 그리고, 틈만 나면 그들에게 전도했다.
서신을 답장을 하기 위해 테일러 부부는 함께 새벽까지 일을 하곤 했다. 그리고, 의료 여행에서는 가끔 부인을 동반하였고 선교지부의 어느 곳에 환자가 있으면, 그는 다른 지부로 떠났고 그녀는 그곳에 남아 돌보아 주기도 하면서 사역을 했다.
그 당시 테일러는 아직 개척되지 않은 9개 성에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기도를 성경에 기록했었다. 그리고 어느 때는 수개월 동안 자금이 최악의 상태에 있었을 때,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편지와 함께 미개척 지대를 위해 사용해 달라고 돈 800파운드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 이로인해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었고 새로운 활기를 주었다.
또한 이때 테일러의 자녀들과 고국 선교부를 맡아 헌신적으로 충성을 했던 블래칠리양이 너무도 많은 업무에 시달려 건강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 테일러가 서부 선교부 일을 하다 말고 주드에게 맡기고 중국을 떠나기도 전에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영국에 도착했을 때는 어린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선교부의 기도회도 중단되어 있었다. 그래서 흩어진 아이들을 다시 모으고 선교부도 재정비 하였다.
테일러는 영국을 갔다올때 마다 선교지원자를 많이 데리고 왔다. 그의 헌신적인 태도와 열정, 그리고 복음에 대한 열망이 전해져서 각양각색의 지원자들이 모이는 것이었다. “한달에 100만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라는 그의 호소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하지만 내지선교회의 성공에도 비난은 계속되었다.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의 자질이 낮다는 데 관련한 비난이 가장 심했다. 영국인은 교육 받는 것을 중요시 했고 그래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1874-1875년 겨울 테일러가 병들어서 기동을 못하는 몸으로 영국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는 침대에 매어 놓은 로프의 도움을 받아서야 겨우 움직일 수가 있었고, 처음에는 편지로 손수 써 보냈으나 나중에는 연필도 잡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테일러가 쓴 조그만 종이 쪽지에 9개성에 18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기도해 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 기록된 것을 기독교 신문사에 입수되어 기사화되었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그때부터 테일러의 서신업무는 대단히 바빠졌다.
그리고 하나님께 구한 18명의 선교사들이 오기 시작했고, 그의 침대 옆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는 반이 시작되었다. 한 번은 중국에 송금할 돈이 평상시보다 235파운드가 부족했는데,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그날 밤 우편 배달부에 의해서 235파운드 79페니의 수표가 배달되었다. 또 한 번은 불편한 몸으로 모임을 인도하고 돌아오는데 러시아 신사가 그의 설교를 들었다면서 중국 선교를 위해 써달라고 50파운드를 건네주었는데, 선교부 집에 돌아와 보니 중국에 송금할 돈이 49파운드 10페니가 부족해서 그것을 놓고 합심기도를 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테이블 위에 50파운드짜리 지폐를 놓으면서 하나님께 찬양했다.
이처럼 기도의 응답은 받았으나 중국 내륙지방으로 가는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 최후의 순간에 중국 외무성에 변화가 일어났는데, 총독 이홍장이 영국의 장관을 만나 유명한 조약을 조인하므로써 중국의 어느 지방이든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테일러는 몇몇 선교지부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는 그 안에서 쉬며 기뻐하네”하며 휘파람을 불자 18명의 선교사중에 한사람인 니콜이 옆에 있다가 “아니, 동료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휘파람이 나옵니까?”라고 물었다. 이때 테일러는 “니콜형제, 우리가 근심하고 고민한다고 그들에게 도움이 됩니까?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일을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무거운 마음을 주님께 맡깁시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비결이었다. 그는 주님 안에서 의지하고 기뻐하는 삶이 그의 신앙 기본이었다.
1876-1878년 내륙지방을 향해 전격적인 포교활동이 개시되었다. 중국 북쪽 지방에는 600만명의 기아선상에 놓여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수천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었고, 처녀들은 종으로 팔려 남쪽 도시로 떼를 지어 실려 갔다. 그리고 약탈과 파괴가 자행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향한 구호가 절박하고 복음 전파의 기회였는데, 갈 수 있는 여성지원자를 모았지만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중국어를 잘하고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적합한 사람은 테일러 부인 뿐이었다. 테일러 부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을 확인하고 희생을 자원하고, 자기가 낳은 두어린 아이와 좀 큰 네 아이들, 그리고 양녀 하나 등 일곱식구를 뒤에 두고 기꺼이 떠나기로 했다. 선교사의 아내는 아내일 뿐만 아니라 선교사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녀의 의견이었고 이것에 테일러도 동의했다.
테일러 부인은 최초로 여성사역자를 이끌고 내륙지방전도를 위해 현지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테일러는 영국으로 구호모금 운동을 위해 떠났다. 여성 선교가 시작된 지 2년쯤 되었을 때 깊숙한 내륙지방에서 60-70명의 구원받은 중국인들이 조그만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점점 빠른 성장이 동시에 있게 되었다.
1879년에는 테일러가 생명을 잃을 뻔했던 심각한 질병을 앓았다. 그 다음 해에는 사태가 호전되는 하나님의 으혜도 있었으나, 선교부는 축적된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시련과 역경은 마치 법칙과도 같이 항상 사역의 확장과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 수년에 걸친 기도와 강인한 노력의 결과로 이제 예전에 볼 수 없는 전도의 문이 열렸고 내륙지방이 그들 앞에 개방되어있었다. 남,북,서쪽 곳곳의 선교지부에 증원이 필요했다.
당시 선교부의 총 인원은 100명 정도였고 자금사정도 순조롭지 못했다. 그러나 무창에 모인 선교사들은 3년 내에 70명의 사역자를 허락해 달라고 기도를 하였고, 그 기도대로 70명의 선교사는 3년 내에 놀랍게 채워졌다.
선교부의 제1회 중국 선교부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그때 1년에 100명의 선교사 파송을 위해 기도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 전보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놀랐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100명의 선교사를 선발하셔서 이들에게 필요한 50,000불의 자금과 함께 중국에 보내줄 것을 믿고 기도하였다. 그들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지원자 600명 중에 102명이 선발되어 모든 준비를 갖추어 파송되었고 50,000달러가 아니고 55,000달러가 접수되었다.
미국의 한 기업인 헨리 프로스프가 영국을 방문하여 테일러를 미국에 초청하였지만, 처음에는 테일러가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미국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무디의 따뜻한 영접을 받게된다. 그리고 성서 수양회를 참석하여 여러 지도자들을 만났고, 3개월 후 14명의 젊은 남녀와 함께 중국으로 돌아왔다.
각 종파에서 참여했고,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서 헌금과 기도가 예상치 않게 몰려오기 시작했으며, 그 후 중국 복음화를 위한 준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북미에 중국 내륙선교회 북미 선교부가 창설되었고. 이렇게 하여 테일러의 복음 사업중 마지막 12년은 전세계적인 사역이 되었다.
스칸디나비아를 방문했을 때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일할 일꾼들이 일어났으며, 호주와 뉴질랜드도 일어났다. 상해에 위치한 내륙선교회도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큰 규모로 조직되게 되었다.
1900.5. ‘의화단 사건’이 전국을 휩쓸었다. 이때 테일러는 아내의 권유로 스위스의 조용한 곳에서 휴양하고 있을 때, 폭동과 대량 학살, 그리고 선교부의 곳곳에서 피난민들을 소탕한다는 공포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135명의 선교사와 53명의 선교사 자녀들이 살해되었던 것이다. 대부분 중국내지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었다. 그 중에서는 독신 여성선교사들도 많았다. 이러한 소식에 대한 충격을 테일러는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이윽고 의화단 사건은 지나가고 1902년 그는 선교회 대표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1904년 아내 제니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떠났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테일러는 혼자 중국을 향했다. 73세인 테일러는 이번 중국 방문 여행에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중국을 향했다. 그곳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존경심으로 영접해 주었고 어디를 가나 “중국의 은인”으로 불렀다.
중국에 도착한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프랭크 켈러박사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그토록 많이 들어 왔던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였다. 곧 테일러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그날 밤 고통 하나 없이 주님께서는 테일러를 영원한 본향으로 불러가셨다.
내륙선교회는 창립 당시의 원리인 “기금을 빚지지 말고 구걸하지 말라” 위에 오늘날도 견고히 서 있다. 그리고 1964년 중국내지선교회는 100년 동안 써오던 명칭을 바꿨는데,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였다. 아시아 선교에 주력하는 이 선교회의 특징이 잘 반영되었다.
'레포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식인종을 변화시킨 선교사 죤 페이튼 (0) | 2009.06.17 |
---|---|
로랜드 알렌 (0) | 2009.05.06 |
개혁주의 성경해석 (0) | 2009.04.14 |
헨리 벤과 루퍼스 앤더슨 (0) | 2009.04.01 |
[스크랩] 개혁주의 이해 (0) | 2009.03.26 |